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휴먼브랜드 '세종'으로 보는 섬김의 리더십

휴먼브랜드

by Content director 2021. 10. 22. 09:57

본문

The interview with 박현모 여주대학교 교수(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할 뿐이다.’

《세종실록》28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손꼽히는 세종은 그 이름만으로도 존재가치가 빛나는 대표적인 휴먼브랜드다. 세종 재위 기간인 32년(1418-1450)은 ‘문화 융성의 부흥기’로 한글 창제를 비롯해 해시계, 혼천의 등 눈부신 과학 기술 성과로 이어졌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세종 리더십을 연구해온  ‘세종 학자’ 박현모 교수는 “늘 백성과 함께 했던 ‘여민’의 마음은 휴먼브랜드 세종의 근간이 되었다”면서 세종의 진면목을 전해주었다.

 

세종의 휴먼브랜드란?
"섬김, 리더십" 
세종은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바탕으로 한 섬김의 리더십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강점 리더십을 발휘하여, 500년 역사의 살아있는 휴먼브랜드로 존재하고 있다.

 

정부 공인 세종대왕 어진

 

박현모 교수는 원래 정조를 연구한 학자였다. 정조가 힘들 때마다 찾았던, 가장 존경한 인물 세종대왕. 그 이유가 궁금해서 발을 들여놓았던 길, 어언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163권의 《세종실록》을 12번 완독 한 그는 수많은 업적을 가능케 한 세종의 리더십에 주목해왔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는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세종대왕릉에서 진행됐다. 세종대왕을 오롯이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우리를 재실로 안내했다. 재실은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후대 왕이나 신하들이 경건히 준비하는 목욕재계 장소다. 햇살이 가득 비치던 한낮 오후, 그는 “대청마루에 앉아보라”며 운을 뗐다. ‘햇볕’처럼 따스한 세종의 성품을 온전히 느껴보라는 박 교수의 배려였다.

 

 

‘백성을 구제할 방법을
항상 가슴에 생각하라’
《세종실록》7년

 

 

Unitas BRAND 수많은 왕들 중에서 특히 세종대왕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브랜드 관점에서 세종대왕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박현모 교수 2001년부터 올해로 16년째 됩니다. 새해 첫날 이 곳 *재실(齋室)에 앉아 ‘좋은 지도자는 어떤 지도자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지도자란 ‘햇빛처럼 밝게 헤아리는 지도자’입니다. 사사로운 것을 밝게 헤아리는 분별력이 있는 지도자죠. 또 하나는 ‘햇볕처럼 따뜻한 지도자’입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감옥의 죄수들, 버려진 아이들을 햇볕처럼 보듬어주는 따뜻함… 세종에게 밝은 분별력과 따뜻함을 배웁니다.

 

*재실 
왕의 제례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곳. 왕릉 입구에 위치해 있다.

 

Unitas BRAND 휴먼브랜드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대가를 지불한 사람이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세종대왕께서도 대가를 지불하면서 고수했던 가치는 무엇입니까?


박현모 교수 세종은 대왕의 권위, 편리함을 포기했습니다. 실록엔 문어농부(問於農夫), 농부에게 물어보았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직접 백성들을 만난다는 건 굉장히 번거롭고 힘든 일입니다. 근데 세종은 *난사위지(難事爲之). ‘일을 어렵게 여겨서 하라’고 했어요. 그래야 백성들을 제대로 돌볼 수 있으니까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종을 조선, 명나라, 일본을 모두 합친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유교의) 성군인 요순 같은 임금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종의 브랜드 네임이라고 할 수 있죠.

 

*난사위지
세종은 정치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 군주였다. 난사위지는 재위 9년에 칠원 현감 양봉래를 현지에 보내며 한 말로, ‘다스리는 것을 어렵게 여겨 신중하게 하면 성공한다’는 뜻이다. "대개 일을 쉽게 여기고 하면 성공하지 못하나, 그 일을 어렵게 여겨서 하는 이는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니 너는 그것에 힘쓰라." 
-《세종실록》9년

 

 

Unitas BRAND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정도로 특별했나요? 

 

박현모 교수 세종은 ‘여민(與民)’, 백성과 더불어 산다고 얘기합니다. 예를 들면, 세종은 선진 농법을 집약한《농사직설(農事直說)》을 전국으로 보내 ‘땅을 새로 개간한 농민들에게 2년간 면세해주고, 3년째는 50%, 4년째부터는 본격적으로 세금을 거둬라’ 하십니다. 그때 경상도 관찰사가 ‘간사한 백성들이 기존의 땅을 개간했다고 속여 구분할 수 없으니 새로 개간한 땅도 세금을 받게 해 주십시오’라고 상소를 올리자 세종께서는 ‘어찌 구분할 수 없단 말인가. 백성과 더불어서 여민 하면 가능하다’ 하십니다. 이는 관찰사가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일하기 때문이지 현장에서 여민 하면, 백성들이 다 알려준다는 뜻입니다. 세종은 백성과 여민동락(與民同樂)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위민(爲民)과 애민(愛民)의 군주는 많았지만, 백성과 함께하는 ‘여민(與民)’의 지도자는 세종이 처음입니다. 

 

세종은 백성과 여민동락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위민과 애민의 군주는 많았지만, 백성과 함께하는 여민의 지도자는 세종이 처음입니다. 

 

 

Unitas BRAND 세종이 백성들과 함께하는 ‘여민’을 특히 강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현모 교수 세종은 *국왕추대설, 즉 ‘백성들이 하는 일을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고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했다’라는 생각을 근간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본래 하늘에서 났다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는데, 세종은 백성들이 필요에 의해 임금을 추대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백성과 더불어 하지 않는 것은 정치의 본체를 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세종은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은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한 일화를 보면 1월 1일, 소나무들이 서리로 하얗게 변해 감로(甘露), 즉 이슬이 맺히니 신하들이 ‘훌륭한 임금이 오셔서 하늘이 상서로움을 내렸으니 축하잔치를 열겠다고’ 아첨합니다. 또 경기도 관찰사는 이삭 하나에 여러 알이 달린 다이삭 품종을 가져와 ‘성군이 오셔서 하늘이 상서로움을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이에 세종은 ‘아름다움을 가장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이것을 심어서 여러 개로 만들어 내년에 다시 가져오라’ 하십니다. 이렇듯 세종은 자기 절제를 통해 백성의 곁에 늘 있고자 했습니다. 

 

*국왕 추대설
《세종실록》 13년에서 세종은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정치를 이야기했다. 이 개념은 18-19세기 정약용에 이르러 ‘국왕 추대설’ 이란 개념으로 사용되었고, 17-18세기 서양 민주주의의 ‘사회 계약설’ 보다 300년 이상 앞선 생각이었다.

 

 

세종은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뽑았습니다.
신분상 결격이 있지만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꿈꾸게 했습니다.

 

 

Unitas BRAND 한글 외에도 ‘여민’의 결과로 나온 어떤 게 있을까요?


박현모 교수 *해시계입니다. 당시 시계는 궁궐이나 일부 양반층에서만 볼 수 있는데 세종은 오목 해시계를 만들어서 청계천 입구에 내놓습니다. 특이한 건 해시계에서 시간을 표시하는 부분에 ‘자시’, ‘축시’로 표시하는 대신, 쥐, 소 그림을 그려 넣습니다. 신하들이 ‘귀하게 만들어 왜 길가에 내버리십니까’ 반발하자, 세종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지시(知時)’ 즉, 시간을 알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백성의 품격이 높아져야 국격도 높아진다고 생각한 겁니다. 

 

‘문자를 만들어 백성의 인식을 높이고 해시계를 만들어 시간이라는 정보를 공유케 하라’ 
《세종실록》 14년

 

*해시계 
세종은 오목 해시계를 만들어 도성 가운데 내어 놓고, 자동 물시계가 알리는 시간을 경회루의 남문에서 월화 문(月華門, 경복궁의 서문)으로, 그리고 광화문 대종고(大鍾鼓, 광화문에 설치되었던 커다란 종과 북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시보 역할을 했다)로 ‘차례로 전하여 치게’ 하는 등 당시 양반들만이 독점하던 시간이라는 고급 정보를 백성들과 공유했다.

-《세종이라면》 박현모 저

 

 

Unitas BRAND 당시 백성에 대한 세종의 생각은 어떤 면에서는 파격적입니다. 
신하들과도 충돌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박현모 교수 그런 점이 지금의 세종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종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던 걸 하셨던 분’ 입니다. 대표적인 게 ‘최만리 상소’입니다. 무지렁이 백성에게 문자를 알려줘도 소용없다는 내용이죠. 요즘으로 치면 법조문, 처방전을 어렵고, 읽을 수 없게 써서 ‘언어권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글창제의 진정한 뜻은 백성들에게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 행동하게  함으로써 억울함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노비 출산 휴가 제도도 그렇습니다. 신하들은 백성에 대한 불신으로 끊임없이 반대하지만, 세종께서는 ‘부당하게 평민을 의심하지 말라’ 하시며, ‘아이 낳기 전 30일’ ‘아이 낳고 100일’의 휴가와 노비 남편의 출산 휴가를 법제화시킵니다.

 

 

 

 

Unitas BRAND 율곡 이이는 “우리나라 만년의 운이 세종에게서 처음 그 기틀이 잡혔다. 백성들의 형편이 겨우 넉넉해지고 많아졌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세종 재위 기간 동안 다방면에서 *상당히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요?

 

박현모 교수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책입니다. 세종께서 《*치평요람(治平要覽)》, 치국은 국내 정치, 평천하는 대외관계에 관한 성공과 실패 사례를 모았는데,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요람(要覽)’으로 에센스만 담은 책입니다. 세종은 역사책을 보면서 실패의 원인을 파악하고, 인재를 쓸 때도 약점보다 강점에 주목하여, 이를 최대한 발휘하게 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강점으로 그 약점을 보완하는 ‘강점 경영’을 하였습니다. 또한,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뽑았습니다.

 

천민 신분의 장영실, 못 배운 군인 아들인 최윤덕, 천인의 어머니를 둔 황희 등 신분상 결격이 있지만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꿈꾸게 했습니다. 인재들에게 ‘이런 나라를 만들고 싶다’라는 비전과 주인의식을 갖게 한 것이죠. 항상 신하의 말을 경청하고 적극 지지해주었습니다.

 

*세종 재위 기간 내 과학 기술성과

일본 이또 준타로의 《과학사 기술사 사전》에 따르면, 세종 재위 기간에 거둔 과학기술의 성과는 21건으로 중국(4건), 일본(0건), 유럽, 아랍을 다 합친 전 지역(19건) 보다 많다. 세종 재위 초반(2년)부터 후반(28년)까지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 세 학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발전하였다.

-《세종이라면》 박현모 저

 

*치평요람
‘무릇 정치를 잘하려면 반드시 이전 시대 중 잘 다스려진 세상과 어지러운 세상이 역사에 남긴 자취를 보아야 할 것이요, 그 자취를 보려면 오직 역사의 기록을 참고하여야 한다’(《세종실록》 23년)는 말처럼, 세종은 당시 과거에 성공하거나 실패한 사례를 통해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정책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치평요람》이 편찬되었다. 

 

 

 

Unitas BRAND 세종의 인재 운영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습니까? 


박현모 교수 인재를 선발할 때 신분을 상관하지 않고 능력 위주의 인재를 뽑았습니다. 사람에겐 강점과 약점이 있기에, 잘할 수 있는 부분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셨지요. 당시 과거 중심의 인재 선발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전국의 인재를 추천하라고 했으며, 재능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등용했습니다. 이런 분야는 재주를 취한다는 ‘취재(取才)’ 분야로, 조선에서 인재를 등용하지 않던 분야였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회의시간에도 고상하고 점전 항상 ‘이런 경우 세종대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합니다.

‘세종은 어떤 색깔을 좋아하셨을까, 언제 슬퍼하고 기뻐하셨을까….’ 그렇게 세종의 모습을 그려가면서 세종대왕을 느낍니다. 하루에 절반 이상 세종을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니 아직 멀었지만, 천분의 일 정도 닮지 않았을까요.

 

 

Unitas BRAND 만약 세종대왕을 인터뷰하신다면 어떤 질문을 하고 싶으신가요? 


박현모 교수 세종이 왕이 된 후, 7년간 매우 힘들었습니다. 처음에 아버지가 군사, 행정권을 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조가 죽은 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원망이 많았고, 신하들도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20대 말에서 30대,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이겨내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제가 추론하기론 인재 양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종이 말하길 ‘가뭄, 홍수는 인력으로 못하지만, 인사는 사람이 할 수 있다’ 했듯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서 힘든 시기를 견뎌내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종은 천한 노비 조차도, 하늘 백성인 ‘천민’이라 했습니다. 
인간의 존귀함, 그 믿음이 강했던 것이죠. ‘나는 너를 믿는다’ 
그 믿음이 어쩌면 저렇게 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상대방도 이를 느끼게 했습니다. 

 

 

 

Unitas BRAND 마지막으로, 교수님께서 세종을 요약한다면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박현모 교수 ‘인간에 대한 신뢰’입니다. 사람이 미래라는 것이죠. 세종은 천한 노비 조차도, 하늘 백성인 ‘천민’이라 했습니다. 인간의 존귀함, 그 믿음이 강했던 것이죠. ‘나는 너를 믿는다’ 그 믿음이 어쩌면 저렇게 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상대방도 이를 느끼게 했습니다. 실제로 세종은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초가집에서 2년간 생활합니다. 백성들과 고통을 같이 한 거죠. 이를 염려한 신하들이 띠집에 짚을 깔자, 세종은 ‘누가 내 허락도 없이 짚을 깔았느냐, 힘겨운 백성들과 같이 하려 하니,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라’며 노여워하십니다. 

 

백성들과 만날 때도 호위군사 1명만 데려가고, 임금이 쓰는 큰 양산도 쓰지 않습니다. 힘든 백성을 보며 끼니도 굶고 돌아옵니다. 저는 세종이 후회, 고민했던 이야기를 볼 때마다 인간적으로 많이 와닿습니다. 세종대왕의 마음을 느끼는 게 중요한 것이죠. 휴머니즘… 백성들의 힘든 상황을 공감하고 제도로 개선한 정치적 휴머니즘이 가장 공감됩니다.

 

 

백성과 늘 함께 하고자 했던 세종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발명품인 *한글을 탄생시켰다. 우리가 세종에게 감동하는 이유는 그가 발명한 모든 것 하나하나에 백성을 섬기고, 헤아린 마음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브랜드는 진정으로 이웃을 섬길 때라야 그 빛을 발하듯, 세종은 보이지 않는 가치, 그 진심을 바탕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휴먼브랜드가 되었다. 500여 년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한글
한글이라는 창의적 산물은 백성들이 편히 글을 익히고 쓸 수 있기를 바라는 세종의 간절한 마음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창의성은 한 사람의 재능과 능력으로부터 나온 결과물이 아닌 타인을 항한 시선으로부터 시작되어 창의적 산물로 발현될 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 UB vol.24 <휴먼브랜드> p.128


박현모  하루에 잠자는 시간을 뺀 모든 시간을 세종과 함께한다는 일명 ‘세종대왕 박사’ 박현모 교수는 현재 한국형 리더십개발원의 대표로 국왕, 재상, 선비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정조(正祖)’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세종처럼》 《세종이라면》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정조 사후 63년》 《정치가 정조》 등이 있다. 


출처 : 유니타스브랜드 Vol A. 휴먼브랜드 유니타스브랜드 SEASON 2 Choice 
-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