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나는 복사본인가? 원본인가? 자살과 타살

자기다움

by Content director 2022. 9. 23. 15:36

본문

반응형

 

인생은 테트릭스

아쇼카 자원봉사로 진행하는 Longevity 프로젝트건으로 연락하지 않았던 선후배와 친구들과 만났다.
프로젝트 설명을 하고 선배와 친구 그리고 후배들에게 물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꾸어 물었다.
"어떻게 죽고 싶은가?"
언제 죽고 싶은가라고 묻지 않고 어떤 사람으로 죽고 싶은가를 질문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
"목적이 무엇인지 찾고 목적을 이루면서 살고 싶다."
그러다면 지금까지 그들은 목적없이 살았나? 목적을 이루는 것처럼 열심히 살았다. 테트리스 게임처럼 정신없이 살았다.
군사정권 붕괴와 민주화 운동으로 시작해서 IMF를 비롯한 수많은 테트리스 조각들이 머리위로 내려오면 그것을 삶에 끼워 맞춰 적응하고
점수를 내면서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테트리스 인생 게임이 끝났다.

그럼 인간의 삶에 대해서 

chatGPT는 뭐라고 말할까?

 

ChatGPT가 '제안하는' 인간의 삶

 

AI 언어 모델로서 개인적인 의견이나 신념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다른 철학적, 문화적 관점이 있습니다. 몇 가지 일반적인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과 웰빙 추구: 많은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행복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행복과 웰빙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친절하고 동정심 많은 사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동정심 많고 도움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의미와 성취감을 가져다 준다고 믿습니다.

-개인 목표 및 꿈 달성: 어떤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열정을 따르고, 목표를 추구하고,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더 큰 선good에 기여: 어떤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삶을 개선하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개인의 문화적 배경, 종교적 신념, 가치관, 삶의 경험 등 많은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개인적인 결정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은 각 개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인공지능 번역기에 돌린 번역

 

인공지능은 인간의 삶을 이렇게 제안한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은 각 개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테트리스처럼 위에서 내려오는 조각만 보지말라고 한다. 

우리는 인생을 게임처럼 살았다.

 

 


 

 

복사본은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다. 따라서 복사본들은 하루하루를 생존 모드와 잔존 모드를 오가면서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아간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복사(複死,남과 비슷해져서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것) 중인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아프리카에 가면 ‘스프링벅(springbok)’이라는 사슴이 있다. 그런데 가끔 이 스프링벅들이 강가로 몰려 들어가서 떼로 죽는 참사가 벌어지곤 한다. 그 이유는 사자에게 쫓겨서가 아니다. 바로 앞에서 풀을 뜯는 다른 스프링벅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서로 앞에 있는 새 풀을 먼저 먹겠다고 앞다투어 뛰어가다가 결국 멈추지 못해 당하는 대참사다. 이와 비슷한 떼죽음이 또 있는데 툰드라 지대에 사는 레밍이라는 작은 쥐다. 일명 나그네쥐라고도 하는 이 쥐도 사이비 종교 집단처럼 어떤 때가 되면 바다와 호수로 뛰어들어 모두 죽어 버리는 집단 자살을 한다. 

 

그 이유는 스프링벅처럼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 아니라 내장기관의 문제 때문이다. 그들이 먹은 노르웨이 풀은 레밍의 소화액을 중화시키는 액체를 만들어 낸다. 만약 레밍들이 풀의 양을 적게 섭취하면 풀들은 중화액을 생산하기 시작한 지 약 30시간 후 액체 생산을 중단한다. 그러나 레밍이 증가하면 풀들의 중화액 생산도 계속 증가하기 시작한다. 결국, 중화액 때문에 소화가 잘 안 되는 레밍은 소화를 위해 체내에서 더 많은 소화액을 생산하게 되고, 결국 체력이 고갈되어 굶어 죽기 직전의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그 결과 레밍은 풀을 많이 먹을수록 더욱 허기가 져서 인근 툰드라 지대의 풀들을 모두 먹고 나서 호수나 바다의 가장자리에 도달하게 되는데, 허기를 느끼고 다시 물 건너에 있을 새로운 풀을 향해 돌진하다가 집단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새 풀을 먹겠다고 달려가는 것일까? 아니면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기 때문일까? 우리가 사는 문화와 문명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배고프게 만들고 먹을 것을 가지고 경쟁하게 만든다. 결국 우리가 지금처럼 경쟁하면서 달려가면 벼랑 끝에서 경쟁자와 만나게 될 것이다.

 


 

1993년 나의 첫 직장은 어느 대기업 해외 수출 사업부였다. 10년을 다니고 싶었지만 11개월 만에 사표를 쓰고 나왔다. 그 이유는 내가 입사하자마자 출세가도를 달리던 모 과장이 갑자기 간경화로 사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옆 책상에서 근무하던 또 한 명의 과장이 간암으로 사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장례식장에서 나의 미래를 보았기에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두 분의 과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해외 바이어 및 국내 에이전트를 접대했다. 그들 옆에 가면 피부까지 찌든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풍겼다. 아직도 그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황갈색의 눈에 피부는 거무튀튀했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이미 그때부터 죽어 가고 있었다.

 

2007년 여름에도 이런 비슷한 비극이 있었다. 브랜드 런칭을 준비하던 나는 당시 그 브랜드의 관리 책임자 중 한 명이 집에서 TV를 보다 그대로 잠든 후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2012년 3월에도 옛 직장 친구의 동료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 40여 명씩 자살을 한다. 직업(?) 중에서는 무직자(타 직종보다 2~3배 높다)가, 남성보다는 여성이, 그리고 나이별로는 40대가 가장 많다.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은 80세라지만 아동 사망률을 제외한 통계치를 보면 평균 수명은 85세를 웃돈다. 이 말은 40대에 실업하면 40~50년 동안 자살 유혹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회보장이 열악한 우리나라에서 40세 이후부터는 자살을 충동질하는 무직의 긴장감을 갖고 살아야만 한다. 노년을 위한 적금이나 보험상품들이 즐비하지만, 그것은 푼돈 모아 잔돈으로 연명하는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과연 이 시대의 경제가 노후연금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할 수 있을까?

 

직장인들이 절대로 겪지 말아야 할 두 종류의 비참한 최후가 있다. 하나는 앞서 말한 과로사(過勞死)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복사(複死)다. 과로사란 말 그대로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눌려 고인이 되는 산재를 말한다. 복사(複死)는 복사(複: 겹칠 복, 寫: 베낄 사, 즉 copy)라는 단어 중에 겹칠 복(複)자와 죽을 사(死)를 조합한 신종 산재 개념으로서, 취업 후 직장의 여러 사원 중 한 명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친구처럼 사라지는 것(은퇴 혹은 해고)을 의미한다.

 


 

직장인이 들으면 거북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기업 입장에서 직원을 복사(複死)시키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새로운 인력을 투입하고 낙후된 인력을 내보냄으로써 기업의 생명을 지속시키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근간으로 만들어진 진화론적 기업 생존 시스템이다. 따라서 직원들은 이런 시장 체제를 유지하면서 대량생산을 잘할 수 있도록 조직에 적합하게 규격화되고 복사(複寫)된다. 이 과정에서 잉여인간들이 만들어진다.

 

시장 경제 시스템을 부정하거나 전복시키려 작정하고 이런 선동적인 단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비참하게 들리겠지만, 이것은 현실을 직면하고 직시해서 얻은 결론이다. 더 비참한 것은 복사의 징후는 직장을 얻기 전부터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대기업의 인재 기준에 맞추려 스스로 원본으로서의 인간을 포기하고 정신없이 스펙을 쌓으며 청춘을 보낸다. 대학도 지성과 탐구가 아닌 ‘취업률’을 가장 큰 명예로 여긴다. 광고에서는 젊은이들에게 비전, 열정, 그리고 패기를 가지라던 대학들마저 막상 취업을 위해서는 꿈 깨고 탁월한 스펙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직장 생활에 만족하며 회사에 잘 다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기업의 이러한 생리에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진 선배들의 인생 충고를 귀담아 듣고,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눌러 가며 오늘도 무사히 살아가고 있다. 간혹 자신의 비전과 능력을 펼쳐 보일 곳을 찾아 위험한 이직을 감행해 보지만 그조차 몇 백만 원의 연봉 상승에 만족할 뿐 이전 직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닳고 닳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프링벅 샐러리맨이 된다. 그야말로 먹을 것을 남들보다 좀 더 많이 먹기 위해서 초원을 뛰어다니는 전형적인 샐러리맨이다. 곧 샐러리맨의  ‘복사본’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복사본은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다. 따라서 복사본들은 하루하루를 생존 모드와 잔존 모드를 오가면서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아간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복사 (複死, 남과 비슷해져서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것) 중인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그렇다면 직장인들에게 일어나는 복사(複死)의 원인은 무엇일까? 모험하지 않는 인생이 가장 위험한 인생이라는 말이 있듯, ‘자기다움’이라는 가치를 위해 모험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있는 자기다움, 본능, 인생을 걸 만한 가치와 신념을 따르지 않고 가장 안정된 직장을 선택한 대가다. 즉 스스로 결정한 안락사다.

 


 

뇌사는 의학적으로 사망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학적’ 사망일 뿐이지 심장은 뛰고 있기에 완전히 죽었다고 할 수는 없다.이에 비해 복사(複死)는 의학적으로는 사망하지 않았지만, 시장의 논리로는 이미 사망한 것이다. 복사(複死)는 갑작스럽게 당하는 죽음이 아니다. 암처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진행되는 죽음이다. 만약 과거의 행복한 기억이 미래에 대한 설렘보다 더 많이 삶을 지배한다면 이미 복사(複死)가 시작된 것으로볼 수 있다. 돈이 인생의 의사결정 기준이 되었다면 인공심장기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과 같다. 분명 살아 있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당신은 지금 죽어 가고 있는가? 살아가고 있는가?

 

스프링벅처럼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다면 잠시 멈추어 보자. 지금 가진 돈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지만, 여전히 배고픈 레밍처럼 뭔가를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잠시 멈추고 이 질문에 대답해 보자.

 

“이대로 가면 나는 어디에서 멈추게 될까?”


출처 : 자기다움 유니타스브랜드 SEASON 2 Choice 
- 1. 다른 사람의 꿈에서 깨어나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