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어린왕자도 알았던 브랜드, 관계 맺고 길들여지는 브랜드

브랜딩/브랜드 B자 배우기

by Content director 2022. 3. 15. 11:19

본문

기원(Origin)과 시작(Begin)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gin’이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의 어원은 유전자를 뜻하는 ‘gene’과 같은 계보다. 브랜드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강력한 브랜드는 기원(Origin)에서 시작(Begin)하거나, 혹은 시작해서 기원이 된다. 대체로 이런 브랜드의 기원은 문화에서 시작하며, 그렇게 시작된 브랜드는 또 다른 문화의 기원이 되어 새로운 브랜드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브랜드에 관해 극단적인 비유를 할 때면
서슴없이 ‘브랜드의 영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브랜드는 
관계다

 

어떤 장인들은 상품에 혼을 담아 그것을 ‘작품’으로 만든다고 한다. 상품에 혼이 담기면 작품이 된다는 것은 분명 은유적인 표현인데 왜 공감이 될까? 정말로 잘 만들어진 상품들에서는 장인들의 혼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브랜드에 관해 극단적인 비유를 할 때면 서슴없이 ‘브랜드의 영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말은 정말로 상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다. 마치 자연에 신이 있다고 믿는 범신론(汎神論)의 이단격인 ‘상신론(商神論: 상품에 신이 있다)’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자신의 소유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가지거나 혹은 애정 관계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비단 최근의 일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죽은 미라에서 출토된 부장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도구(지금은 브랜드지만)에 대해서 이상하리만큼 집착을 한다. 수천 년 전에 죽었던 미라의 주변에는 망자가 사용했던 도구들이 함께 있다. 그렇게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유언인지 아니면 예식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시체와 함께 그것들이 묻혔다는 점이다. 도구가 귀하던 원시 고대 사회에서 왜 그 귀한 도구를 죽은 자와 함께 묻어 주었을까? 이런 풍속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민족들에게 똑같이 존재하던 것일까? 아마도 망자는 자신이 생전에 사용하던 도구를 가지고 또 다른 세계로 가고자 했던 것 같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중국의 진시황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사람은 자신의 도구(지금은 브랜드지만)에 대해서 이상하리만큼 집착을 한다. 

 

5,000년 전에 죽은 미라에서 출토된 부장품을 전시하는 뮤지엄에서도 소유에 대한 애착관계를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인간은 죽으면 다른 세계로 간다고 믿었다. 아마도 이러한 도구를 함께 묻었다는 것은 다른 세계에 가서도 자신이 살아서 쓰던 도구를 가지고 싶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도구도 저 세상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은 도구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는 뜻이다.

 

오늘날 브랜드라고 불리는 도구에 대해 사람이 특별한 감정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먼저 구글에 들어가 ‘컨버스(Converse)’라는 브랜드를 입력하고 이미지를 검색해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사진들이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더 명확히 알고 싶다면 나이키, 푸마 그리고 아디다스를 입력해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이 현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플리커(Flicker)에 들어가 컨버스의 사진을 검색해보면 컨버스가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브랜드의 영성은 마치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영을 불어넣은 것처럼, 
인간이 상품에 자신의 감성과 관계를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이 ‘용도와 기능’을 떠나 ‘의미와 가치’ 가 되어 가는 것이 진정한 브랜드다. 

 

컨버스의 경우, 어떤 사이트를 통해 검색하든 대부분 동일한 이미지가 검색되는데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해 보면 바로 ‘LOVE’다. 컨버스는 농구화다. 그런데 왜 ‘사랑’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졌을까? 나이키처럼 ‘Just do it’과 같은 캠페인을 하지 않는데도 전 세계 사람들은 왜 컨버스를 사랑의 미디어로 생각할까? 바로 여기에 영적인 부분이 있다.

 

 

만약 ‘자동차와 가족’이라는 검색어로 구글에 접속해 이미지를 찾아보면 더 재미있는 사진이 나온다. 자동차 옆에서 가족들이 일렬로 차려 자세로 찍은 사진들이다. 최초의 자동차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자동차까지 전 세계 사람들은 자동차 앞에서 식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예식을 한다. 냉장고, 오디오, TV 앞에서 가족들이 모여 사진을 찍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새로운 자동차가 식구가 되었다고 가족이 모두 나가 환영을 하는 것일까? 

 

 

브랜드의 영성은 마치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영을 불어넣은 것처럼, 인간이 상품에 자신의 감성과 관계를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이 ‘용도와 기능’을 떠나 ‘의미와 가치’가 되어 가는 것이 진정한 브랜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업계에서는 ‘강력한 브랜드’, 그리고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을 ‘마니아’라고 부르지만,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그런 현상과 결과가 아니다. 바로 인간이 왜 자신의 도구에 대해 이토록 애착심을 가질까 하는 이유다. 

 

그 이유에 대해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지금 나한테 너는 수백 수천 명의 다른 아이들과 별 다를 것 없는 한 아이일 뿐이야. 나는 네가 필요하지 않은 거야. 그리고 네 입장에선, 너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지. 너에게 있어 나도 수백수천 마리의 다른 여우들과 별 다를 것 없는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너는 내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고….”

 

시장에서도 어린왕자와 여우의 관계처럼 
‘소비되는 브랜드’와 달리 ‘길들여지는 브랜드’가 있다. 

 

 

여우와 친구가 되고 싶었던 어린 왕자는 친구 이전에 먼저 관계 맺기인 ‘길들여지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왕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아.” 

 

시장에서도 어린왕자와 여우의 관계처럼 ‘소비되는 브랜드’와 달리 ‘길들여지는 브랜드’가 있다. 그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비자와 브랜드가 아니라 소비자, 생산자 그리고 그 중간에 브랜드가 끼여 있는 기묘한 삼각관계다. 이 셋은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면서 브랜딩 되고 있다.

 

최근에 애플 마니아, 할리데이비슨 마니아 등 수많은 브랜드의 마니아들이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우 입장에서 이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시 한 번 여우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우린 우리가 길들인 것밖에는 이해할 수가 없어.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떤 
것을 이해할 시간을 갖고 있지 않아. 상점에서 이미 만들어진 물건만 산단 말이야. 그러나 어딜 가도 우정을 살 수 있는 가게는 없어. 사람들에겐 이제 친구도 사라질 거야. 네 가 친구를 원한다면 어서 나를 길들여줘.”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소비되는 상품’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친구로서 길들여지는 것을 원한다. 
따라서 브랜드 경영자들은 이제 손님, 고객 그리고 
소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친구’라는 관점으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 

 

 

브랜드 입문자들은 이제 더 이상 특정 브랜드들의 마니아를 신기하게 보지 말고 브랜드와 소비자 간에 ‘길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소비되는 상품’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친구로서 길들여지는 것을 원한다. 따라서 브랜드 경영자들은 이제 손님, 고객 그리고 소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친구’라는 관점으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 

 

영화 <애니홀(annie hall)>에서 감독이자 주연배우였던 우디 앨런은 어린왕자의 여우와 비슷한 관점으로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관계란 상어 같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죽거든.” 


제대로 된 브랜드를 관리하는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 줄 안다. 소비자와 브랜드 간에 소통이 없으면 브랜드는 그저 일용품으로 전락되어 사라지는 것이 바로 최근의 시장 상황이다. 

 

 

하나의 상품은 그저 소비되지만, 브랜드는 개별 상품을 떠나
총체적인 체험으로서 브랜드와 소비자가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진다.

 

관계 맺는 브랜드, 
길들여지는 브랜드


하나의 상품은 그저 소비되지만, 브랜드는 개별 상품을 떠나 총체적인 체험으로서 브랜드와 소비자가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진다. 특정 브랜드에게 길들여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것은 마치 개, 고양이, 설치류(쥐), 곤충류를 반려동물이라 부르며 자기 침대에서 기르는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즉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공감 없는 이해일 뿐이다. 

 

우리는 브랜드에게 길들여지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가 커피를 들고 길거리를 다니면서 마셨을까?

언제부터 우리가 스마트폰을 인공심장기처럼 가슴에 품고 다녔을까?

언제부터 우리가 천만 원이 넘는 핸드백에 수십만 원이나 되는 화장품을 넣고 다녔을까?

언제부터 우리가 산에 올라갈 때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기능성 등산복을 입었을까?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우리의 삶은 브랜드들이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길들여지고 있다.

 

우리의 삶은 브랜드들이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따르고 길들여지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제품들은 ‘이름’이 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것에 누군가가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당신의 책상 위나 혹은 창문 밖의 거리를 살펴보자.

 

 

모든 상품에는 상표가 있다. 상표가 없는 상품은 거의 없다.

유일하게 상품으로만 거래되는 것이 있다면 길거리에서 파는 반찬과 나물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1차 생산물도 요즘은 모두 상호가 있는 가게에서 판매된다.

별로 놀라운 사실이라 생각되지 않겠지만, 이 세상 모든 제품들은 ‘이름’이 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것에 누군가가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구 혹은 소비품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지식은 무엇일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지식은 무엇일까?

나는 더불어 살아가는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브랜드는 그 지식의 중심에 있다. 우리는 기업에서 일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법인명일 뿐, 실제로는 브랜드의 중심에서 일한다. 브랜드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시장이며, 그 시장의 구조에 의해 사회가 형성된다. 뿐만 아니라 브랜드는 상품가치, 사용가치, 상징 가치, 소장가치 등 수많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면서 상품 이상의 상품이 되어 문화를 만들어 간다. 

 

브랜드는 상품가치, 사용가치, 상징가치, 소장가치 등 
수많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면서 상품 이상의 상품이 되어 문화를 만들어 간다. 

 

이처럼 브랜드는 상품이 아닌 문화가 되어 우리의 호흡이 되어 가고 있다. 소비가 문화가 되어 버리는 순간 우리는 소비의 대상인 브랜드를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친구 혹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바로 이렇게 친구가 되는 것이다. 결국 브랜드의 영혼은 친구의 영혼이다. 브랜드를 사는 사람이 사용자와 소비자가 아닌 반려자, 동반자 그리고 협력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비의 대상인 브랜드를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친구 혹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바로 이렇게 친구가 되는 것이다.

 

혹 이런 생각이 너무나 급진적이며 과장된 생각일까?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해보겠다. 

나에게 와인의 맛을 표현하는 단어는 ‘쓰고’, ‘덜 쓰고’, 또는 ‘달달하다’ 뿐이다. 그런데 내 소믈리에 친구가 알려주는 와인의 맛은 너무나 다양하다. 무겁고, 섬세하고, 가볍고, 진하며, 유혹적이고, 냉정하고 등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뿐만 아니라 와인을 느끼는 감각도 눈으로 마시고, 코로 마시고, 혀의 여섯 군데를 적시면서 마시고 나중에는 목으로 느낀다고 한다. 그는 와인은 신의 음료이기 때문에 맛에서 영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친구의 말을 들으며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두고, 일부러 의식까지 하며 와인을 맛보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와인은 떨떠름한 맛일 뿐이다.

 

소비가 문화가 되어 버리는 순간 우리는 소비의 대상인 브랜드를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친구 혹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바리스타 친구는 더 황당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나에게 드립 커피를 만들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 봐, 이렇게 더운물을 부을 때 커피가 파이처럼 불룩 올라오잖아. 이것이 바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야.”

정말로 그는 커피가 살아 숨쉬고 있다고 믿는 것일까? 하지만 그의 눈빛을 본다면 정말로 믿는 것 같다. 

 

소믈리에와 바리스타의 주장이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일단 그들의 말을 믿고 시장을 바라본다면 브랜드의 시장을 볼 수 있다. 현재 수많은 커피숍들이 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곳곳에서 와인이 팔리고 있다. 10년 전에는 이런 모습이 존재했을까? 커피는 일명 ‘다방커피’를 기반으로 가장 고가의 커피는 헤이즐넛 커피 정도였다. 간혹 특이한 커피가 메뉴판에 몇 개 있었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다. 

 

소믈리에와 바리스타의 주장이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일단 그들의 말을 믿고 시장을 바라본다면 브랜드의 시장을 볼 수 있다. 

 

와인은 어떤가? 과거에는 수입 제한 항목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동네마다 있는 마트 진열대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브랜드들이 마트에 입점되어 있으며, 그 브랜드 수만큼이나 잡지, 출판, 방송 등 너무나 많은 영역에서 소개되고 있다. 비록 내가 와인과 커피에 관심이 없어도 세상은 이렇게 커피 브랜드와 와인 브랜드의 세상으로 점점 충만해지고 있다. 

 

애플이라는 브랜드의 성장기를 우리는 10여 년 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애플 브랜드의 라이프사이클과 확장 모델을 보게 되었다. 만약에 애플과 비슷한 영향력을 가진 브랜드가 향후 100개 등장한다면 그야말로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따라서 브랜드에 관한 지식은 시장뿐만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지식이다. 

 

브랜드에 관한 지식은 시장뿐만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지식이다. 

 

명화를 감상할 때 단 5분이라도 큐레이터의 소개를 듣고 볼 때와 듣지 않고 볼 때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처럼, 브랜드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왜 이 브랜드를 좋아하는지도 알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것을 추구하는 지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브랜드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믈리에 친구에게 한참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중 나는 몇 년도산 와인이 가장 맛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와인은 오래되었다고 맛있는 것이 아니고, 또 몇 년간 와인이 특별히 맛있는 것도 아니야. 오랫동안 사귀어 온 사람이나 오랫동안 사귈 사람과 먹을 때 가장 맛있지!” 

 

이 친구도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아.” 

 


출처 : 유니타스브랜드 Vol 25 브랜드 B자 배우기 유니타스브랜드 SEASON 2 Choic
- 어린왕자도 알았던 브랜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