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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스텔바작의 자기다움, 이것만이 내 세상

자기다움

by Content director 2022. 9. 28.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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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다움을 구축하는 것은 자신의 세상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시장 점유율을 높히는 것처럼 자신의 권력을 넓히는 것도 아니다. 이 국가의 구성 요소인 영토는 공간이 아닌 바로 자신의 시간이다. 자기다움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움직일 수 있을까?

까스텔바작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통해 ‘자기다움’을 찾고, 그것을 컨셉으로 만들어 브랜드를 런칭하는 일의 과정을 통해 그 과정을 옅본다.

 

 

내가 창조한 세상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할까?

나의 세상에서 나는 황제일까? 아니면 문지기일까?

내 세상의 가치는 어떤 것으로 이루어졌을까?

천국 같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어떤 사람의 세상을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지옥인 경우도 있다.

만약에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사람을 만나면, 그곳이 어떤 세상인지 이 질문 하나로 충분히 알 수 있다.

 

“당신의 세상을 움직이는 (헌)법은 무엇인가요?” 법이라는 단어 때문에 부담스러워한다면 ‘가치’라고 말해도 좋다.

 

자기다움을 구축하는 것은 자신의 세상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시장 점유율을 높히는 것처럼 자신의 권력을 넓히는 것도 아니다. 이 국가의 구성 요소인 영토는 공간이 아닌 바로 자신의 시간이다. 자기다움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움직일 수 있을까?

 

나는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인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Jean-Charles de Castelbajac)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계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인터뷰를 통해서 까스텔바작의 ‘자기다움’을 찾고, 그것을 컨셉으로 만들어 브랜드를 런칭하는 일을 해야 했다. 아래의 글은 《유니타스브랜드》에 기재한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 Jean Charles de Castelbajac. All rights reserved

 

만약 까스텔바작이 궁금해서 구글로 이미지 검색을 하면 41년 동안 해온 그의 여러 가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나도 구글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서 그의 자기다움이 무엇인지를 정리했다.

나는 구글의 이미지 검색을 통해서 세상에 흩어져 있는 그의 작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까스텔바작의 화학식은 ‘F’라는 단어로 정렬되고 있었다. 그는 패션(Fashion)을 기반으로 ‘환상적인’ 혹은 ‘몽환적인(Fantasy)’ 이미지를 만들고 있었다. 판타지(Fantasy)를 구성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융합(Flux)이었다. 그는 감성(Feeling)과 재미(Fun)를 섞어, 미래(Future)적인 이미지로 판타지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런 형태의 융합을 그가 이미 1969년부터 해왔다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실험 정신으로 탄생한 첫 작품은 놀랍게도 ‘담요로 만든 옷’이었다.

 

F로 정렬되는 그의 화학식을 따라가다 보니, 그의 정체성이 ‘FEGO’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FEGO는 장난감 브랜드인 LEGO에서 가지고 왔다. 

LEGO의 창업자인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얀센(Ole Kirk Christiansen)이 덴마크어로 ‘잘 논다(Leg와 Godt)’를 뜻하는 단어들을 조합하여 LEGO를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까스텔바작은 레고를 가지고 옷을 만들거나 자신의 얼굴과 심벌을 레고로 만들었으며, 레고의 디자인을 차용해 레고 안경과 레고 시계도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페고의 관점으로 다시 까스텔바작의 작품 세계를 보면, 레고처럼 기억, 상징, 의미, 트렌드들의 조각들이 마치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맞춰지면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듯했다.

 

 

까스텔바작의 작품을 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난해하기까지 하다. 조화보다는 파괴, 원형보다는 기형 그리고 전일성보다는 특이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어서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그가 만들었던 30년 전 옷을 보면서 난해함이 아닌 놀라움을 발견했다는데 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30년 전에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그 옷을 입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금 패션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혁신적인 컨셉들이 이미 수십 년 전에 그가 해온 임상실험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어떤 미학의 코드가 있는 것일까? 대체 어떤 관점으로 디자인을 하기에 현재에 미래의 옷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럼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혹은 “내가 무엇인 것 같은가?” “
그리고 추가하자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 같은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질문밖에 없을 것이다. 질문은 간단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이다. 그래서 그를 만나자마자 첫 질문으로 이것을 물었다. 그런데 그는 마치 부메랑처럼 그 질문을 나에게 도로 던져 버렸다.

 

 “그럼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혹은 “내가 무엇인 것 같은가?” “그리고 추가하자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 같은가?”

 

그는 누구일까? 

지금까지 살펴본 화학식과 컨셉들로 미루어 그를 정의해 본다면 Fashion Cre(ative)Editor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가 창조적인 에너지를 이용해 자신이 하지 않은 창조물을 편집해서 재창조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편집된 것을 다시 창조해서 새로운 편집물까지 만든다. 전에 없던 것을 만드는 창조자보다는 원형과 기원을 융합시켜 새롭게 만들기 때문에 Cre-Editor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대답이 지금까지 들어 본 것 중 가장 까스텔바작다운 답변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Interview

CASTELBAJAC
까스떼바작 인터뷰

 

 

권민 어떤 시작이든지 처음에는 항상 운명과 우연이 동시에 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일은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시작하지는 않고, 아주 우연히 시작되죠. 하지만 당신이 패션을 시작해서 4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이 길을 걸어왔다면 분명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잠깐 40년을 돌이켜 보고 여기까지의 운명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까스텔바작(CASTELBAJAC) 지금 돌이켜 보면, 저의 인생은 때마다 당시에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의 큰 힘으로 조각들이 만들어지면서 지금은 그 조각들이 하나로 완성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공시성’입니다. 저에게는 공시성이라 할 수 있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어요. 당시에는 이런 현상에 대해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해석조차 할 수 없었죠. 

 

지금의 저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한국에서 제가 해야 할 일들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의 기원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의 집안은 829년의 나바라 왕국(Kingdom of Navarra)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가문입니다. 1300년 필립 르 벨(Philippe Le Bel) 왕 때 피에르 드 까스텔바작(Pierre de Castelbajac)이라는 귀족 작위를 받게 되었죠. 

 

조상 대대로 저희 집안은 군인 집안이었습니다. 저 또한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가 다니시던 군인 예비 사관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죠. 그런데 그곳은 불합리하고 체벌이 아주 심한 학교였어요. 제 상상력의 기원은 암울했던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저는 매일 밤마다 아마존의 정복자가 되거나,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거나, 아니면 기숙사가 아닌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상상을 통해 현실 도피를 한 것은 힘든 학교 생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즈음 저희 가문은 몰락했어요. 

 

 

할아버지는 무려 세 채나 되는 성(城)을 소유하고 있었고, 어디를 갈 때면 전용 열차를 타고 갈 정도로 엄청난 부자였지요. 아버지도 12대 후작이자 26대 남작인, 그러니까 귀족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았습니다. 또한 최고의 방직 기술자로, 당시 아버지와 함께 일한 분이 바로 크리스챤 디올의 창업주인 마르셀 부삭(Marcel Boussac)이에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만 경마에 모든 재산을 탕진해 버렸어요. 아버지가 32세가 되던 해에 가문은 완전히 몰락해서 결국 아버지는 모로코로 건너가 궁정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 제가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강한 소명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소명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 같습니다. 

 

 

제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오라토리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옮겨 갔지만, 이곳은 전의 기숙사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이었습니다. 결국 17세 때 그 학교에 불을 지르고 퇴학을 당했습니다. 당시 저의 어머니는 작은 봉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후 어머니 밑에서 잡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의 제안으로 디자인 스케치를 하게 되었지요.

 

우습게 들리겠지만, 당시 저는 패션을 통해 저의 불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분노를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제 삶과 생각뿐만 아니라 억압받았던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혁명을 패션을 통해 외치고 싶었던 거죠. 패션은 저에게 있어 분노의 승화였던 겁니다. 가문의 몰락과 기숙사의 억압적 생활이 분명 저에게는 아픔이지만, 이것은 저에게 ‘올바르게’ 분노할 에너지원이 되어 준 셈입니다.

 

 

권민 어떤 식의 분노를 패션에서 보여 주었나요?

 

까스텔바작(CASTELBAJAC) 그때 저는 디자이너거나 예술가는 아니었습니다. 반(反) 문명, 반(反) 전통을 추구하는 기괴한 다다이즘(dadaism)에 빠진 몽상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군복의 카키색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고, 채소 장수들이 쓰는 플라스틱 풀과 체리로 옷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런가 하면 감자를 담는 부대나 의료용 실로도 옷을 만들었어요. 

 

당시 프랑스 유행은 너무 여성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류 계층을 위한 스타일을 추구했어요. 저는 그런 트렌드에 대해 사람들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옷이 꼭 예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패션은 저의 전투였습니다. 1967년에는 지금과 같은 패션쇼가 없었죠. 그러니까 패션이 산업은 아니었어요. 주로 양장점에서 만들어 내는 맞춤복이 패션을 리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저는 파리 프레타 포르테 살롱에 참여해 대형 기업들을 비집고 들어가서 저의 옷을 보여 주기 시작했습니다. 살롱에 참여한 지 3일째 되는 날, 주변 기업들에서 저의 부스를 영업 방해로 신고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부스에 사람들이 아주 많이 왔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살롱에서 이룬 저의 작은 성공을 보고 디자인 회사를 차려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운영하는 회사의 이름을 KO & CO로 바꾸고 지인이던 샹탈 토마스(Chantal Tomass)와 다카다 겐조(Takada Kenzo)와 함께 컬렉션 작업을 했습니다. 그 결과는 폭발적이었죠. 그때 저는 18세밖에 안 된 청년이었어요. 그럼에도 10개나 되는 큰 기업들이 저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을 정도였죠. 기라로쉬(Guy Laroche)에서는 오트 쿠튀르 제안도 왔지만 저는 이 모든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때 파리는 이른바 여성해방운동이 막 시작되는 태동기였어요. 당시 저는 제 안에 있는 분노의 혁명과 사회의 해방이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철학에 푹 빠져 있었죠. 그러다 20대 초반에 저의 철학이 구축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저의 세계관이 만들어진 거예요. 저는 이 철학을 제 패션에 주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반항적인 차원에서 패션을 이용했지만, 이러한 철학이 만들어지면서부터는 새로운 장르와 이미지라는 세련된 형태의 메시지를 통해 저의 분노를 표현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는 분노가 단순히 화가 난 감정이 아닌, 생각의 형태 혹은 다른 방향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어요.

 

말콤 맥라렌(Malcon Robert Andrew Edwards)
"그는 나의 가장 오래된 벗이고, 나 또한 그의 가까운 친구다.”

“나는 20년 이상 까스텔바작을 알고 지냈다. 나는 위스키를 마시고, 그는 와인을 마셨다. 나는 반항아처럼 옷을 입었고, 그는 *Perfecto 재킷을 입었다. 그에게는 빨간 할리 모터사이클이 있었는데 그는 그걸 타고 몽마르트르 거리를 오르내렸다. 그는 밤이면 핀볼 게임을 하곤 했는데, 나는 잘하지 못했지만 그는 매우 잘했다. 나는 친구인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무대 의상 작업을 했고, 섹스 피스톨즈를 결성했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나는 검은색의 바스크 베레모를 쓰고 가죽옷을 입었다. 그는 군복 같은 걸 입었다. 우리는 테크노(Techno)와 록(Rock), 그리고 낭만주의와 상황주의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나는 섹스 피스톨즈의 무대의상을 만들기 위해 가죽과 고무를 사용했다. 그는 그의 의상에 담요를 사용했다. 나중에 나는 파리로 이사했고, 에스닉(Ethnic) 음악을 좋아했다. 그는 결혼을 했고, 18세기 음악을 좋아했다. 나는 격자무늬 슈트를 입었고, 그는 매우 클래식(Classic)한 옷을 좋아했다. 나는 무정부주의자였고, 그는 왕정주의자였다. 

나는 힙합(Hip-Hop)과 *Buffalo Gals를 좋아했고, 그는 *Roxy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는 뉴에이지(New Age) 음악을 들었고, 그의 디자인은 팝(POP) 문화에 기반했다. 나는 유럽을 좋아했고, 그는 미국을 좋아했다. 나는 고전주의를 좋아했고, 그는 현대 미술을 좋아했다. 나는 오페라를 좋아했고, 그는 블루스를 좋아했다. 나는 나비 부인을 재해석했고, 그는 미키 마우스를 재창조했다. 나는 영적인 것을 좋아했고, 그는 천사를 좋아했다.
나는 *알리스터 크로울리(Alister Crowley)의 반지를 끼었고, 그는 그의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었다. 지금 나는 런던에 살고, 그는 파리에 산다. 나는 토종 스코틀랜드 사람이고, 그는 뼛속까지 프랑스인이다. 그는 나의 가장 오래된 벗이고, 나 또한 그의 가까운 친구다.”

 

그의 친구 이야기만으로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 안에서도 ‘자기다움’을 충분히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세계가 어떤지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언론인 장 프랑수아 비조(Jean-Francois Bizot)에게 까스텔바작에 대해 들어 보자.

 

장 프랑소아 비조(Jean Francois Bizot)
"우리는 1972년 그곳에서 만났다."

“그에게는 할리데이비슨의 모터사이클이 한 대 있었는데, 라이더 재킷을 입은 모습이 무척 터프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것 봐, 로큰롤 귀공자께서 납시셨군.”
그의 모습은 좀 이상했다. 그때 그는 재미 삼아 패션 쪽의 일을 막 시작할 때였고, 자신을 할리 모터사이클을 사기 위해 창을 팔아먹은 반항적인 중세 기사쯤으로 여겼다. 그는 리슐리외(Rue de Richelieu) 30번가의 Pierre d’ Alby’s에서 무척 즐겁게 패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우편으로 발송되는 잡지를 만들면서, 언론사의 각 부서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부터 나중에는 어떻게 언론사를 꾸려 나가는지까지 차근차근 배우고 있었다. 우리는 1972년 그곳에서 만났다. 나는 그때 막 일을 시작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펑크(Punk)에 매료되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그도 자신만의 고민거리가 있었다. Jean-Charles은 그의 이국적인 이인용 판초로 유명했는데, 밤이면 티셔츠와 옷들을 갈가리 찢곤 했다.”

 

이제 까스텔바작에 관한 두 가지의 의문이 모두 해결되었다. 그는 누구이며 무엇이 되려는지도 알았고, 왜 파리의 골목과 벽마다 낙서를 그렸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의 정체성을 브랜드 관점으로 정리해 본다면 한마디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인터뷰 중 “자신의 옷에 비트 있는 메시지를 유머로 담아 사람들에게 직설적으로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까스텔바작의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의 그를 알았다면, 이제 그것보다 더 궁금한 점이 세 가지 더 생겼다. 첫째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을 40년 동안 했다면 일련의 패턴이 있을 것이다. 과연 지금까지의 그의 창조적인 이미지 생산을 법칙으로 만들 수 있을까? 둘째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응용할 수 있을까? 셋째는 지금도 왕성한 창조력을 가진 그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이제 그 스스로가 미래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이런 질문을 하지 못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아주 재미있는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질문의 강도를 높여서 비논리적이며 창의적인 질문도 해보았다.


 

권민 당신이 지금까지 보여준 디자인의 본질적 가치는 기존 시장 질서의 창조적 파괴와 기존의 이미지를 다시 융합하여 만드는 창조적 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까스텔바작(CASTELBAJAC) 본질을 말한다면 창조적 파괴와 결합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저는 인문학적 가치를 패션의 수많은 창작품에서 보여주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적 가치는 ‘인간’ 그 자체입니다. 제 어린 시절의 작품은 기존 질서와 말도 안 되는 억압에 대한 항거였다면, 지금은 젊은이들에게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제가 많은 예술가와 브랜드들과 협업을 하는 이유는 창조적 파괴와 결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두 개의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여 나타나는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입니다. 

 

새로운 것이 그저 새로운 것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냥 처음 본 것에 불과하죠. 만약 새로운 것이 미래의 것이라면 그것도 단지 미래의 것이겠죠. 제가 말하는 새로운 것이란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가 공존하면서 서로 존중하고, 변하지 않는 가치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새로움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제는 쇼보다는 과거를 존중하고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그런 브랜드를 만들어서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권민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까스텔바작(CASTELBAJAC) 저는 번개 같습니다. 고스트 바스터(Ghost bust-er) 같기도 하고, 트러블 메이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아름다운 패배자라고 불렀지만, 저는 저에 대한 정의로 ‘모호함’이라는 단어를 가장 좋아합니다.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들은 천재적인 디자이너 혹은 천재적인 가능성이 있는 디자이너가 발굴되면 그를 매체에 노출하고 연예인들과 만남을 주선하면서 소위 미디어 스타로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트렌디한 이미지를 자신의 브랜드에 접목해 이른바 ‘우성’ 결합을 한다. 

 

아무래도 대중들은 브랜드와 신상품보다는 특별한 사람에 더 관심이 많아서 명품 브랜드들은 천재라고 불리는 디자이너들의 작품성보다는 미디어 친화력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상품성을 더 중요시한다. 브랜드의 노출은 한계가 있지만, 사람의 노출은 언제나 가십과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디자이너를 트렌드 메이커로 사용하는 것이다.

 

 

해외 명품 브랜드일수록 작품성보다는 상품성, 상품성보다는 유행성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원래 명품 브랜드들은 속칭 값싼 것 10개 사느니 제대로(?) 된 것 하나 사서 오래 소장하라는 합리적인 제안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또 명품일수록 소비자들에게 선보이는 상품의 수량을 조절하면서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도 원칙만 그렇지 실상은 다르다. 원칙적으로 명품은 트렌드에 대항하는 것이지만, 오히려 가장 잘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주도하는 세력들이 바로 명품 브랜드들이다.

 

이런 명품 브랜드들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에 없었던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는 까스텔바작은 탐탁지 않은 인물이다. 브랜드는 천재성이 있는 디자이너를 다룰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짜 천재는 다룰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천재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세상에서 그 진가를 인정받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천재들은 다음 세상을 알았지만, 우리들은 다음 세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까스텔바작의 작품 활동은 무려 40여 년이나 지속되고 있다. 그가 천재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의 1970년대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위에서 언급했다. 지금은 너무나 친숙해 보이는 이미지이지만 40년 전에는 매우 기이한 패션이었다.

 

 

권민 이 브랜드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까스텔바작(CASTELBAJAC) 저는 이 브랜드가 젊은이를 위한 대중 럭셔리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비싸야만 럭셔리가 아닙니다. 럭셔리는 말 그대로 ‘빛나야’ 합니다. 가격이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는 이 브랜드의 컨셉을 ‘The house of Brave’라고 정했습니다. 저는 이 브랜드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저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저도 17살에 퇴학을 당한 그렇고 그런 젊은이에 불과했지만, 나의 가치를 믿었더니 오늘날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혁명적인 브랜드를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혁명이란 이런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스스로 자처해 아방가르드한 상품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기업가 정신을 가진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을 주도하는 혁신적인, 그러니까 혁명적인 일을 하고 싶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예전에는 저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어 우리들의 목소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이 로마교황청의 주문을 받아 만든 그 옷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따뜻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브랜드를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제 아들을 보면서 이 브랜드를 만들고 있습니다.

 

 

단지 팔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보면서 그를 위한 옷을 만들 때 그 옷의 진정성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제 아들인 루이 마리를 보면서 이 브랜드를 만들 때 이것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내가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드는 개인의 상표이기보다는 시대와 국가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권민 당신은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예술가이면서 시인인가요? 아니면 시인이면서 예술가인가요? 어떤 것이 더 우성인자인가요?

 

까스텔바작(CASTELBAJAC) 아마도 예술가이면서 시인인 것 같습니다.

 

 

권민 그렇다면 매우 어려운 청을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당신에 관한 것을 주제로 하여 지금 즉흥적으로 시 한 수를 지어 줄 수 있을까요?

 

까스텔바작 : 
Sur mon chemin 
En marche vers demain 

J'emporte mes souvenirs 

En regardant l'avenir 

J'emporte mes amis morts 

Comme un trésor

 

La conquête pour donner 

Dans ma quête d'aimer 

 

내일로 내딛는
발걸음 그 길 위에

 

미래를 바라보며
나의 추억들을 품고 간다

 

보석을 든 것처럼
나의 죽은 친구들을 품고 간다

 

내가 사랑을 추구함에 있어 

쟁취하는 것은 베풀기 위함임을

 

 

까스텔바작은 비어 있는 컵을 잠깐 응시한 후에 컵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시를 지었다. 시를 지으면서 눈물이 눈에 고였다. 그렇게 즉흥시가 지어진 후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어색한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서로 고개를 끄덕일 뿐 뭐라고 끝내야 할지 몰랐다. 나는 한동안 그의 세계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출처 : 자기다움 유니타스브랜드 SEASON 2 Choice 
- 3. 자기다움으로 자기 세상을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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