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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 거듭남

자기다움

by Content director 2022. 9. 2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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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다움을 확인하고 구축하기 위해 조급해하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자기다움의 과정도 인생의 결과이고, 그 결과도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다움을 구축하는 것은 세상에서 자기다움 없이 살다가 잠시 본질로 돌아가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코마 상태에 있던 사람이 잠시 일어난 것과 같다. 자기다움이란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

 

 

‘자기다움’에 관한 세미나를 하고 나면 초고를 읽고 피드백을 준 에디터가 던진 것과 같은 3종 질문 세트가 항상 나온다. 

 

첫째는 도대체 언제까지 자기다움을 구축해야 하는가? 

둘째는 자신이 결정한 자기다움이 진짜 자기다움인지 어떻게 아는가? 

셋째는 자기다움을 갖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인가이다.

 

아기는 태어나기까지 엄마의 자궁에서 10개월 동안 머물러야 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태어나자마자 ‘자기다움’이 뭔지도 모른 채 경쟁 모드에 돌입한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그런 생활을 멈추고, 자기다움을 위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자기다움은 성격 테스트처럼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최소한 어머니의 자궁에서 보낸 10개월의 시간은 필요하지 않을까? 

나의 경우 대략 3년 정도 걸린 것 같다. 물론 잉태 시간이 길다고 해서 자기다움이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짧을수록 좋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여기서 10개월이란 잉태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나의 경험치이기도 하다.

 


 

만개한 국화꽃을 빨리 보고 싶어서 누군가가 억지로 꽃봉오리를 벌리면, 꽃은 찢어지거나 시들어 버린다. 

알에서 태어나는 모든 생물도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만 살 수 있다. 

누군가가 밖에서 알을 깨는 것을 도와주면 건강한 성장을 하지 못하고 병약하게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자기다움을 구축하는 노력의 수준을 다시 태어나는 수준으로 올려 보자. 

 

일단 자기다움이 구축되고 나면, 자신보다 주변 사람이 이를 먼저 알아본다. 자기다움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잘난 척이지만, 누군가가 인정하여 이야기해 주는 것은 칭찬이다. 만개한 국화꽃과 알에서 부화한 생명체를 보고 놀라워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나를 보고 놀라워할 때까지 자기다움에서 먼저 벗어나지 말자.

 

어떻게 진짜 자기다움인지 아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 함께 사는 배우자가 어떻게 진짜 배우자인지 아는가?’로 되묻곤 한다. 어떤 부부는 한눈에 서로가 배우자임을 알았다고 한다. 또 다른 부부는 원하던 조건이 맞아서 부부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부부가 되었건 간에 어떤 부부는 결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가 하면, 어떤 부부는 1년도 못 돼 헤어지기도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대안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은 꼬이게 된다.

 


 

나는 나의 ‘자기다움’을 선택하는 데만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후 9년 동안 그것을 확인하고, 수정하고, 훈련하고 다듬었다. 자기다움을 처음부터 제대로 구축하기는 어렵다. 원래의 모습과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기도 하고, 또 다른 것으로 자기다움을 구축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많은 고민을 통해서 자신의 자기다움을 결정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것을 품고 일관성 있게 자신의 생활에 적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간혹 운명(상황)에 의해서 자기다움을 발견할 수도 있고, 막연했던 소명이 명확해지면서 자기다움이 될 수도 있다.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자기다움’이 필요할까, 라는 질문에나는 대답 대신 이런 질문을 한다. 

 

“먹고살기 어려워진 것은 자기다움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만약 출근 하려고 문밖으로 나왔는데 셔츠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출근 시간이 바빠서 그대로 출근했다면 우리는 뭐라고 말할까? 

단추는 다시 풀어 제대로 채워야 한다. 자기다움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어느 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한 제자가 찾아왔다. 그 제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혜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조용히 그를 데리고 해변으로 갔다. 그리고 팔로 우악스럽게 제자의 목을 잡아서 바다에 처박아 버렸다. 제자가 숨이 막혀서 허우적거리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시 숨을 쉬게 한 다음 다시 그의 머리를 바다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몇 번을 되풀이한 후에야 그를 놓아 주었다. 제자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헉헉거리며 “지혜를 구했는데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자네가 물속에서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자네는 나에게 어떻게 지혜를 얻는가를 물어보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물속에서 숨을 쉬고자 했던 열정으로 지혜를 구해 보게. 지혜를 얻게 될 것일세.”

 

이와 같이 자기답게 살기 위한 ‘자기다움’을 얻기 위해서는 이것으로 살려고 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답게 살 수 있다.

 


 

자기다움을 확인하고 구축하기 위해 조급해하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자기다움의 과정도 인생의 결과이고, 그 결과도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다움을 구축하는 것은 세상에서 자기다움 없이 살다가 잠시 본질로 돌아가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코마 상태에 있던 사람이 잠시 일어난 것과 같다.

자기다움이란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자신의 저서인 《몰입의 즐거움》에서 목표를 다스리는 방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자신의 목표를 다스리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은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그것은 자연 발생적 욕망에 몸을 맡기는 것과 다르고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것과도 다르다. 최선의 방안은 자기 욕망의 뿌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편견을 인식하면서, ‘사회적, 물질적 여건’을 지나치게 흩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목표를 겸허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이보다 덜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며, 이보다 과도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좌절을 자처하는 셈이다.”

 

이처럼 자기다움은 긴장과 균형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출처 : 자기다움 유니타스브랜드 SEASON 2 Choice 
- 4. 자기다워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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