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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찾는 과정의 믿음 - 미아보호, 자아보호

자기다움

by Content director 2022. 9. 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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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쪽인 배우자를 찾는 것처럼, 또 다른 나로 태어난 자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자기다움’은 나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본능이다. 비록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의 기원(Origin)은 알 수 없지만, ‘자기다움’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자기를 부르는 마음의 북소리가 들리면서 이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Begin)된다.

 

 

‘그럼 어떻게 자기다움을 찾거나 구축할 수 있나?’ 아마 이 책을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이 질문을 마음속으로 수십 번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은 다 말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공감하지 않았거나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소개될 구체적인 방법은 나의 경험칙(經驗則)일 뿐이다. 따라서 결코 해답은 아니다. 자기다움의 방법은 자기밖에 모른다. 그러므로 자기다움을 구축하기 위한 자기만의 경험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 한 예로 데카르트의 방법을 살펴보자. 

그는 의심을 통해서 확실히 인식하게 된 것만을 진리라고 믿었다.

이런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으로 그는 모든 문제를 완전히 분해시켰다. 이렇게 분해된 문제를 다시 재조합하여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에 이르는 지식의 순서를 정하고 체계화시켰다. 마지막으로 확신으로 진리를 인정할 때까지 관련된 모든 지식을 열거하고 검사했다. 데카르트를 자기다움에 이르게 한 사유 방식은 ‘증명을 위한 분해 그리고 종합하여 열거한 후 나온 검증’이다. 그렇다면 나만의 사유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7년 만에 어렵게 딸을 갖게 되었다. 나는 태어난 지 3분도 되지 않은 아이를 보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을 했다. ‘나는 이 딸을 위해서 당장 죽을 수 있을까?’ ‘당연하지!’ 대답은 반사적으로 나왔다. 

10개월 동안 내 딸을 뱃속에서 키운 것은 내가 아니다. 이 딸을 얻기 위해서 공급한 것은 3억이 넘는 정자들뿐이고 이 딸은 그중의 하나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확률로 얻어진 나의 딸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런 황당한 질문을 하게 된 것은 7년 동안 딸처럼 키운 '몽찌'라는 반려동물 때문이다. 몽찌가 7년 동안 아내와 나 사이에서 끼어 잤다면 그것은 개일까, 사람일까? 개가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 세계 토픽에 나온 경우는 있지만, 사람이 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경우는 없다. 비록 나는 7년 동안 몽찌를 딸처럼 키웠지만 생명을 바칠 마음은 전혀 없다.

 

나의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이 갑작스러운 ‘감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궁금하다. 이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곤충부터 시작해서 물고기까지 가지고 있는 부성애와 모성애다. 나는 이것을 단지 종족 번식을 위한 본능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런 마음을 본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낭만적이고 고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반쪽을 배우자라고 한다. 자녀는 자신의 유전을 가지고 태어난 50%의 또 다른 자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반쪽을 얻기 위해서 많은 대가를 지불한다. 그뿐 아니라 아이를 낳고 기르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찾고 구축하려는 ‘자기다움’도 자신의 반쪽인 배우자와 자녀를 얻는 것과 같다. 또 다른 자신과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얻는 기쁨도 있지만 고통도 있고 어려움과 갈등도 있다. 내가 말하는 자기다움도 이런 것이다. 자기다움을 구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운명적으로 발견해서 결합할 수도 있지만, 현재 자기다움이라고 믿는 것을 평생 의심할 수도 있다.

 

‘자기다움’을 찾고 구축하려고 마음먹으면 배우자와 자녀를 처음 만날 때와 같은 설렘이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생긴 어려움과 혼돈으로 말미암아 내면의 충돌과 낯선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그래도 끊임없이 자기다움을 찾는 것에 대해서 종교는 소명이라고 말한다. 비록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의 기원(Origin)은 알 수 없지만, ‘자기다움’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자기를 부르는 마음의 북소리가 들리면서 이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Begin)된다.

 


 

인간은 부성애와 모성애에 대해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뭉클한 감정선을 만드는 주요 소재로 모성애와 부성애가 쓰인다. 심지어 우주 괴물이 나오는 영화에서조차 모성애의 애틋한 사랑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부성애와 모성애를 버린 인간은 ‘동물보다 못하다’라는 말을 듣지만, 지구상에서 모성애와 부성애와 같은 본능을 거스르는 것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에 이 말은 틀린 말이다.

 

“내가 찾는 자기다움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라고 누군가 나에게 물으면 나는 “부모의 사랑으로 자녀를 보는 그런 기분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자기다움의 열망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찾는 것이다. 나의 반쪽인 배우자를 찾는 것처럼, 또 다른 나로 태어난 자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자기다움’은 나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본능이다.

 

“그렇게 나의 반쪽을 찾는 열정으로 노력하면 자기다움을 구축(만날 수)할 수 있나요? 혹시 엉뚱한 자기다움을 찾으면 어떻게 하죠?”

이런 질문도 받는다.

그렇다면 현재 나와 함께 사는 배우자가 진짜 내 배우자란 증거가 있는가?

아마 결혼한 사람이라면 싸울 때마다 한 번쯤은 부부가 된 것을 후회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만약에 20년 동안 키운 아이가 친자가 아니라 병원에서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장 집을 나가라고 할까? 

이런 염려로 자기다움을 찾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림자 없는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 당신은 자기다움을 완벽하게 알았는지를 오직 ‘예’와 ‘아니오’로 대답하라고 한다면, 그 대답은 ‘아니오’다. 

그럼에도 내가 ‘자기다움’이라고 믿고 있는 이것들보다 현재 더 사랑하는 것은 없다. 비록 나의 자기다움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나에게 중요하다. 내 딸을 목숨을 걸고 지킬 수 있는 것처럼, 지금 내가 믿고 있는 ‘자기다움’도 목숨을 걸고 지킬 만한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한 나의 ‘자기다움’은 미아가 아니라 나의 딸이다. 

그래서 아름답다(나답다).


출처 : 자기다움 유니타스브랜드 SEASON 2 Choice 
- 2. 자기다움은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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