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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말하는 인문학적 시선, 브랜더가 견자의 시선을 가지게 된다면?

브랜딩/브랜드 인문학, 인문학적브랜드

by Content director 2022. 5. 1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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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AGP, Banque d'Image, Paris - GNC media, Seoul, Ren Magritte / ADAGP, Pari

The interview with 시인·문화비평가 김갑수

 


견자의 시선을 가진 브랜더라면
단순히 ‘필요’에 의한 부분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것에 눈이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화되는 순간 사람들은
이때 보지 못한 낯선 것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나는 김갑수 선생이 쓴 에세이집인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를 단 하루 만에 쭉 읽어 내려갔다. 혼란한 시대를 자유자재로 읽어대며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인이라고 부르짖는 그와의 인터뷰가 기대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 책을 읽으려던 소기의 목적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나는 김갑수 선생을 소개할 때 이름 뒤에 어떤 호칭을 붙여야 할까를 두고 한참 동안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분명 시인으로 시작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클래식 음악의 전문가로 알고 있다(유니타스브랜드가 그를 처음 만난 것도 그가 음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는 강연장이었다). 

 

문화비평가로 많은 글을 썼지만 정작 라디오 프로그램의 ‘DJ와 인문학 열전’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더 많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실에 들어가면 경계가 더 모호해진다. 어디서부터 셈을 시작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수백만 장이 넘는 클래식 LP판이 사방을 빼곡히 채우고 있고, 150년 전에 사용되었다는 서너 개의 커피밀을 비롯한 다양한 커피밀들이 주방을 수놓고 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로 시선을 돌리면 설명해주지 않으면 도저히 그 메시지를 읽기 힘든 현대적 이미지들이라 오히려 클래식으로부터는 거리가 더 멀어진다. 인터뷰 도중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후에 끊으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친군데, 맨날 전화하는데도 나는 맨날 누군지 모르니, 허허허.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저장을 잘 안 해. 아직 습관이 안 되었어. 그런데 휴대폰에 스무 명 이상(의 전화번호가) 저장되면, 너무 징그러운 거 아녜요? 그러고는 살 수가 없어, 하하하.”나는 이 말들을 듣고 그제야 김갑수 선생이 ‘시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김갑수 시인의 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

 

 

세월의 거지 

 

우리들 꿈의 거지 환멸의 거지 

굽실거리며 찾아가는 세월 속에

발길에 툭 채이는 욕망의 거지 

깡통에 술을 담고 무죄를 두드리며 

허둥지둥 찾아가는 아, 몹쓸 죄 많은 세상 

너를 닮은 나의 거지  

꼭 닮은 거지의 일가친척 여기 모이니 

식빵과 라면과 통조림과 포장육의 

식욕이 닮았고 

욕설과 분노와 고함과 절규의 

목청이 닮았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과 모르는 날의 

생김새가 까무러치게 닮아서 

일간지 기사를 주사 맞고 

나날의 면죄부 펄럭이며 

북 치는 거지 장구 치는 거지

 

 

인터뷰를 하는 도중 또 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너무 열심히 얘기해서 정신이 어질어질합니다.” 정말로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인터뷰를 했다. 두 번에 걸친 인터뷰를 합친다면 약 5시간 동안 우리는 인문학과 브랜드의 접점을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KTV에서 방송되는 ‘인문학 열전’을 진행하며 우리나라 인문학 계보의 리더 수십여 명과 인터뷰를 한 분답게, 그는 인문학에 관한 공인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인문학의 정의와 현실, 그리고 가치에 대해 논하며 나름대로 분별의 눈이 생긴 것이리라. 그래서 인문학을 인터뷰하기 위해서는 김갑수여야만 했다. 시적인 정의와 직관적 분석 밑에 지식과 지식의 연결 구조는 클래식 교향곡처럼 템포와 선율로 이어지는 장장 다섯 시간에 걸친 인터뷰였지만, 아쉽게도 여기에 쓴 글은 3막 중 1막에 불과하다.

 

 


인문학인가? 

 

UnitasBRAND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디지털 산업의 리더 격인 구글에서도 인문학을 전공한 인재들을 대거 채용했다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한마디로 ‘인문학 열풍’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종의 트렌드일까요, 아니면 사이클일까요?

 

깁갑수(이하 '김') 저도 여러 분야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이다 보니 미국이나 유럽의 유수한 대학들의 사이트에 자주 접속합니다. 강의 커리큘럼을 보기 위함이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하버드 대학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대학에서 전공과는 상관없이 항상 커리큘럼에 인문학 강좌가 올라오더군요. 이를 통해 현재 세계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질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문학 열풍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한마디로 얘기하면 ‘결핍’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언가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은 항상 어떤 것의 결핍으로부터 초래되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무엇의 결핍일까요? 저는 ‘창의력’이라고 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인문학 열풍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무언가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은 항상 어떤 것의 결핍으로부터 초래되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무엇의 결핍일까요? 저는 ‘창의력’이라고 봅니다. 

 


지금 도래한 사회를 과거와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가 뭐냐 하면, 바로 하드웨어가 완성된 것입니다. 산업 사회를 간단하게 도식화해서 설명해 보면 하드웨어를 탄탄하게 만들어서 인간의 완력을 극대화시킨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하드웨어를 만들어 인간의 능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죠. 그리고는 결국 그것을 완성했습니다. 자, 이제부터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튼튼한 공장을 짓고 거기에서 수만 개의 제품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움직이죠. 그런데 말 그대로 공장에서 판박이처럼 찍어 내는 똑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시대가 지속되자 인간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완벽하게 만들어진 하드웨어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공장에서 판박이처럼 찍어 내는 똑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시대가 지속되자 
인간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창의성’이라는 화두가 던져지기 시작하죠. 처음에는 개인적인 창의성이 요구되었어요. 그래서 타고난 능력이라든가, 혹은 눈썰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각광을 받으며, 그들의 창의성에 의존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이것마저도 인간의 욕망을 채워 주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모두에게 창의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벌어지게 된 겁니다. 이때 사람들은 인문학이라는 것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번 더 질문을 하게 되겠지요. 창의성을 꼭 인문학에서만 배울 수 있는가,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시 하드웨어로 돌아갑니다. 하드웨어가 완성되고 난 후, 인간은 과거를 반추해보며 하드웨어로 인해 결국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었음을 인식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하드웨어가 발전하기 전 ‘인간다움’의 원본을 가졌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 거죠. 인문학을 영어로 쓰면 ‘Humanities’, 그러니까 ‘Humanity’잖아요. 이 용어가 처음으로 생겨난 때가 바로 르네상스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 르네상스 당시의 문학, 예술, 역사 등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시작해 보려고 하는 거지요. 

 

 

하드웨어가 완성되고 난 후, 결국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었음을 인식하게 되고,
발전하기 전 ‘인간다움’의 원본을 가졌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 거죠. 

 

 

UnitasBRAND 르네상스도 중세 시대가 막을 내리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가졌던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부흥운동이었잖아요. 현재도 하드웨어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다움의 상실을 자각하면서 다시 한 번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바로 인문학 열풍으로 해석될 수 있겠군요. 이른바 ‘신(新)르네상스’라 해도 무방할 듯하네요.

 

인간, 나, 주체… 이런 말들이 등장한 게 다름 아닌 *르네상스 시대였죠. 중세 시대는 알고 있다시피 ‘신’이 중심이 되는 시대였어요. 그래서 인간은 신의 권위 아래에 있는 존재였지요. 그런데 중세 시대가 막을 내리자, 인간은 중세 시대 전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인간성’을 찾아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중세 시대는 인간의 창의성이 완전히 정지되어 있던 때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중세 시대 이전 인간의 자유로움이 왕성하던 때인 고대에서 진정한 인간을 찾아오려고 한 거였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인간의 주체성을 연구한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시대의 서막입니다. 

 

디지털 문명은 질서와 규칙이 없는 혼재의 시대인, ‘신(新)야만’의 시대로
인문학을 논할 때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것들을 끌어와서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니깐 신화 같은 것들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문학을 연구한다, 할 때는 바로 이 시기를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대의 것을 가져와 거기서 야만성을 제거하고 문명 시대에 맞는 인간다움을 완성시킨 학문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어요. 현대의 디지털 문명은 조금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거예요. 디지털 문명은 근대적 문명이 가지고 있던 질서, 이성, 법 등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죠. 여기에는 질서가 없어요. 어떤 규칙도 없죠.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는 공간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문명이 건설되기 이전의 시대와 비슷한 환경적 토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디지털 문명을 ‘신(新)야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인문학을 논할 때는 르네상스 시대가 아닌 정말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것들을 끌어와서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화 같은 것들 말입니다. 

 

오늘날의 시대에서 결핍된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는 거죠. 
그러니까 그때의 생각이나 사상을 레퍼런스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건, 고대 그리스·로마시대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문학을 논할 때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나 니체의 철학을 ‘회복’시키자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날의 시대에서 결핍된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는 거죠. 그러니까 그때의 생각이나 사상을 레퍼런스로 본다는 겁니다. 과거의 것을 다시 불러와서 그것을 통해 오늘날 당면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해석할 때 과거의 철학들은 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되어 결국, 결핍을 메워 주는 정신으로 자리매김되는 겁니다. 

 

 

UnitasBRAND ‘인문학 열전’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수많은 인문학자들과 열띤 토론을 진행해 왔는데요, 한 분 한 분 만나면서 인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정의를 내려 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란 대체, 어떤 힘을 가졌기에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킨다 생각하시나요?

 

 인문학이란 당대의 지식이 아니라 몇 천 년의 지식을 다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인문학자란 다른 세기, 다른 시대, 지금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어딘가로 멀리 가지를 뻗은 사람들을 말하죠. 현재에 살고 있지만, 관심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기 때문에 인문학자들의 시야는 소위, ‘별나다’고 할 수 있어요. 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과학만 해도 당대의 현상 분석을 위해 필요에 의해하는 것이지만 인문학은 다릅니다. 

 

 

인문학의 힘은 시공 초월의 것입니다. 
결국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정신과 가치를 찾아낸다는 겁니다. 

 


이것은 시공 초월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전의 관심사나 목전의 필요, 또 그 목전의 동기에 구애 받지 않고, 시야가 굉장히 넓어요. 고고학을 한다든지, 문화인류학을 한다든지, 또 문학을 한다든지 그럴 때, 지금 현재 돌아가는 추세와는 전혀 다른, 엉뚱해 보이는 것을 말 그대로 미친 듯이 파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정신과 가치를 찾아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에요.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어요. *학교 제도라는 것이 도시화의 산물이며 산업 문명의 산물이잖아요. 그래서 이곳에서는 제조된 인간, 즉 만들어진 인간형을 생산합니다. 그런데 인문적 시야는 그런 만들어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진짜 인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을 문학을 통해, 또 문화를 통해, 어떤 때는 역사를 통해, 혹은 철학을 통해 제시하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강요되고 있는 사고방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 추구, 이런 것이 바로 인문정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중 하나입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인문적 시야는 그런 만들어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BRAND Think 
*
숭고

감히 ‘숭고한’이란 형용사를 앞에 두어도 어색하지 않은 브랜드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쩌면 아직 우리는 진짜 ‘브랜드’라 부를 수 있는 브랜드를 만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그 이유는 브랜드의 어원을 살펴볼 때 더욱 선명해진다. ‘브랜드(brand)’의 어원은 ‘낙인찍다(burn)’인데 낙인을 찍는 이유는 ‘구별’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구별’이란 단어가 묘하다. ‘구별’이란 단어를 히브리어에서 찾아보면 ‘거룩(holy)’이라는 단어와 어원과 어근이 같은 ‘카도쉬(kadosh)’로 표현된다. 즉 거룩한 것은 구별된 것이고, 구별된 것은 거룩한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브랜드는 다른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그 무엇, 때로는 거룩하리만큼 경외감이 느껴지는 그런 대상에게만 붙일 수 있는 작위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브랜드라면 숭고함마저 느껴질지 모른다. 독일의 철학가 발터 벤야민의 예술 이론에서 언급한 ‘아우라(aura)’, 즉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내뿜는 브랜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것이 박 교수가 말하는 숭고한 브랜드, 달리 말해 소극적 쾌감을 선사하는 브랜드 아닐까?
설령 숭고함은 인간의 피조물로는 자아낼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한들, 이것을 목표로 도전할 수는 있지 않을까? 

 

*산업혁명

산업혁명은 1760년대 영국에서 먼저 시작하여 서유럽을 중심으로 발생한 산업상의 큰 변화를 말한다. 18세기 후반 유럽은 많은 식민지와 시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럽은 그 식민지로부터 풍요로운 자원 확보가 가능했고, 이는 당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는 토양이 되었다. 영국에서 방직기계가 등장한 것을 시발점으로 종래의 소규모 수공업적 생산양식에서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전환되며 산업상의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공장제 시스템이 출현하고, 자본주의가 완성되는 등 근대적인 개념의 사회구조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또한 시민들의 생활수준 향상과 더불어 이런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계급인 자본가와 노동자가 만들어졌고, 더불어 인구 증가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문제점도 함께 야기되었다. 산업혁명은 프랑스혁명과 더불어 유럽 근대 사회 확립의 가장 중요한 계기로 평가된다. 

 

*르네상스 시대

중세 시대는 신을 위한 사회였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재 유무도 가치가 없다’는 논리가 중세 시대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신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 중세 시대에 인간의 삶은 윤택하지 않았다. 그러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아랍인들의 높은 생활 수준과 문명을 접하며 유럽은 반성과 자각을 시작했고 이것이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후 14~16세기 서유럽에서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의 르네상스 문화 운동이 일어난다. 중세 시대를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라고 하여 ‘야만 시대’라고도 했는데 르네상스 운동은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부흥을 통하여 야만 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이 특징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런 정신적 기반은 ‘인문주의’라는 인문학적 사상을 배경으로 시작되며, 이때부터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된 인격적 개인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학교 제도
미셸 푸코는 군대나 감옥, 학교와 같은 조직에서 근대 문명의 특징을 찾아낸다.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나 군대가 권력자의 뜻대로 사람을 길들이는 훈육의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학생들은 죄수처럼 온갖 감시와 시험 속에서 규율에 길들여지고 순응하게 된다. 또한 학교나 군대에서 가르치는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은 결국 권력자의 이익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며 학교를 개개인의 계산 가능성을 보편화시킨 근대인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푸코는 학교 안에서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자신의 권력 아래 잡아 놓는 것을 ‘미시의 권력’이라 지칭하였는데, 근대인들은 미시 권력의 감시 아래 그 시선을 의식한 채 선택하는 자유 아닌 자유의 상황에 놓여 있다고 비판한다. 

 

왜 
인문학이어야만 
하는가?

 

UnitasBRAND 사실, 인문학이 가장 핫이슈가 되고 있는 곳은 경영 분야일 것입니다.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결국 창의성을 가장 많이 요구하는 곳이 기업이니까요. 그래서 인문학 경영, 브랜드 인문학, 인문학적 광고 등 경영 분야에서는 인문학과 결합한 신종 언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기업은 인문학을 어떤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까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하드웨어 시기에는 말 그대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성실, 근면, 헌신…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죠. 대표적으로 *새마을운동이 그것을 가장 잘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현재는 그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어떤 가치로 변했을까요? 

먼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시장’의 위치가 어디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지배 권력은 다름 아닌 신이었죠. 이것은 단순히 통치 수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집단의 정신적인 통합(integration)까지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근대 시대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이 신권이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로 대체되기 시작됩니다.

 

 

과거에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지금은 어떤 가치로 변했을까요?
시대를 오면서
개개인의 주체성이 들어나면서
자신의 주체성과 부합되는 이데올로기를 따르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주체성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주체성과 부합하는 이데올로기를 따르기 시작하는 거죠. 알다시피 미국과 소련 간의 팽팽했던 냉전체제가 바로 이데올로기 싸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이 이데올로기마저 소련이 무너지면서 사라지고 말죠.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제 믿을 것은 나밖에 없구나, 하며 이른바 개인화되는 시대가 펼쳐집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각각의 개인을 통합시켜 주는 무언가를 원하게 되죠. 

 

혼재하는 다양한 가치 중에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각도로 실험해 보는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끊임없이 조합해보며 이전에 없었던 것을 만드는 중이라는 거죠. 

 


이때 등장한 것이 ‘시장’이라는 겁니다. 즉 국가 권력이 사라진 시점에서 자본을 가진 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죠. 이제 시장은 세계를 움직이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이때 기업이 고민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좋은 상품을 만드는, 그러니까 생산자로서의 기능을 넘어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제 단순히 ‘소비’의 개념으로 기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삶을 유지시켜 주는 새로운 질서로서 기업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인문학을 볼 때 어떤 것을 보아야 하는 것은 이제 자명해진 거죠. 인문학에서 어떤 가치를 가져와야 할 것인가, 이겠지요. 지금은 어떤 가치가 그야말로 대세다, 라기보다는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며 그 가치 중에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각도로 실험해 보는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융합이니, 통합이니 하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끊임없이 조합해보며 이전에 없었던 것을 만드는 중이라는 거죠. 

 

 

국가의 권력이 사라지고 자본을 가진 기업의 등장으로 이것이 세계를 움직이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이때 기업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새마을운동
과거 하드웨어 시대에는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가장 큰 가치로 인정받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인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한국 사회를 특정 짓는, 이른바 풀뿌리 지역사회개발 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국민들의 총체적인 참여로 국가 발전을 촉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일어났다. 실제로 새마을운동은 한국이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신흥공업국으로 도약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가시적 성과를 위해 물량적 사업에만 강압적으로 치중함으로써 국민의 수동적 자세를 조장하여 그들이 운동의 자율적 주체가 아니었다는 문제점도 제기되었다. 

 

 

UnitasBRAND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소비자들이 삶을 유지시켜 주는 새로운 질서로서 기업을 인식하기 시작함에 따라 등장한 것이 바로 ‘브랜드’입니다. 브랜드는 단순히 상품이 아니라, 그 안에 기업이 지향하는 가치가 담겨진 하나의 유기체라고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최근에 기업에서는  ‘영적 가치’가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기업에서 ‘영적 가치’ ‘영성’ 같은 것을 얘기하는 것은 이제 상품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이미 정신적인 가치로 대체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브랜드를 과거에는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고 충동구매를 자아내기 위한 마케팅적인 수단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전혀 다르죠. 사람들의 결핍을 채워 주는 것이 바로 브랜드가 되었으니까요. 브랜드 안에 가치를 담아,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적인 채워짐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한 번 들어 볼까요. 과거에는 명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나도 상위 계층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을 보여 주는 행위였죠.

 

과거에는 명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나도 상위 계층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을 보여 주는 행위였죠.
더 이상 사람들은 신분적 기호로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거죠.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소비의 사회》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물건을 소비할 때 그 사용 가치 때문에 소비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 가진 기호 가치 때문에 소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말을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상위 계층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얼마나 계속될 것 같은가요? 벌써 끝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 보십시오. 최근 영화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위 계층입니다. 소위 안티 히어로죠. 현재 영웅들은 대부분 상위계급과 반대되는 계급에 속해 있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의 디카프리오가 맡은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는 대단한 출신이지만 그는 바닥 신분이에요. 그러나 결국 그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런 구도는 이후로도 많은 영화에서 계속 만들어졌죠. 이처럼 사람들은 더 이상 상위 계층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명품적 가치는 더 이상 가치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더 이상 사람들은 신분적 기호로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거죠.

 

 

저는 다음 세대의 가치를 브랜드가 인문학을 통해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나 소설, 문학은 당시의 시대상을 그러니까 욕망을 표현해 주는 거란 말이죠. 

 

 

명품적 가치와 반대로 민중적 가치라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어요. 1980년대에 나온 개념인데, 이것은 저항 세력의 가치로서 이념 대립을 통해 나온 가치였어요. 당시만 해도 지배와 피지배라는 대립 구도로 사회를 보았으니까요. 그러나 현시대에는 설득되지 못하는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명품적 가치 다음의 가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저는 다음 세대의 가치를 브랜드가 인문학을 통해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나 소설, 문학은 당시의 시대상을 말해 주잖아요. 그러니까 욕망을 표현해 주는 거란 말이죠. 이미 많은 대중문학, 예술에서 시대가 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어요.

 

 

브랜드가 어떤 가치를 찾느냐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이것을 몇 년 전에는 로하스라는 이름으로 보여 줬는가 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보여 주기도 했죠.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모두 *정신적인 가치들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시장은 이제 사람들의 삶을 움직이는 하나의 질서가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브랜드가 어떤 가치를 찾느냐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UnitasBRAND 기업이 인문학을 통해 가치를 찾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아무리 시대적 요구를 피부로 절실히 느꼈다고는 하나 몇 년간 지속되어 온 인문학 열풍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유독 인문학적 소양을 쌓기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시쳇말로 ‘저 사람 좀 폼 나는 거 많이 아네’라는 식으로 그 사람의 교양을 드러내는 정도였습니다. 사실 과거에는 몇몇 사람만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도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사회는 모두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원합니다. 그러면 반문하겠지요. 누가 그걸 모릅니까?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은 걸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말입니다. 

 

이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것은 홀로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스스로의 삶을 회기하고, 반추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 인문학적 소양입니다. 

 

 

왜 우리는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것이 어려울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것을 집단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 문화입니다. 잘 알다시피 학연, 지연과 같은 연고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다 보니 집단이 사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 집단에서 분리되는 순간 자기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정도입니다. 그만큼 개개인이 집단에 단단하게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것은 홀로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스스로의 삶을 회기하고, 반추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 인문학적 소양입니다. 시대를 넘나들면서 사고하며,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대해 사고하기 위해서는 저는 홀로 있으라고 권하고 싶네요. 홀로 있을 줄 알 때, 비로소 인문학적 사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회이론가로서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시뮬라 시웅’이라는 이론과, 상품이 아닌 대중매체가 만들어 낸 기호 또는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소비사회 이론으로 유명하다. 보드리야르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소비의 사회》는 새로운 소비 개념을 통해 현대 대중 사회를 분석한 책이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들의 소비를 사용가치보다는 행복, 안락함, 사회적 권위, 현대성 등의 기호의 소비로 규정한다. 또한 현대 사회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복제의 시대’라는 개념도 제시한다. 그의 이런 이론과 논의는 사회주의의 붕괴와 소비 사회로 진입하는 자본주의 현대 사회의 상황과 맞물려 폭넓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정신적인 가치들
어느 시대도 현대 사회만큼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는 없었다고 말할 만큼 현대인들은 가치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가치는 본질적으로 시대적 산물인데 그것을 가치로 받아들이는 집단에 의해 인정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는 수면 아래에 숨겨져 있다가도 사람들의 새로운 욕구나 사회적 변화 등 여러 요인에 의해 등장하기도 한다. 현재 이러한 가치들이 세상을 움직이며 새로운 질서를 잉태하고 사회적 가치로서 환원되기도 하는데 그 한 예가 바로 로하스다. 로하스(LOHAS)는 ‘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의 약자로 현대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정신적인 가치로서 웰빙(Well-Being)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어 개인의 건강뿐 아니라 사회적 환경까지 생각한다. 특히 로하스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독자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단순히 유기농 상품이 아닌 친환경적 상품의 가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환경문제를 크게 대두시키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있다. 현대인은 로하스와 같이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따라서 가치를 보는 새로운 안목이 요구된다.

 

 

왜 
시여야만
하는가?

 

UnitasBRAND 선생님은 출발이 시인이었습니다. 브랜더들도 브랜드의 컨셉을 잡을 때 종종 시를 써 보는 접근들을 하는데요. 시를 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더군요. 인문학에서 브랜더들이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시에서는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브랜더가 만약 시인이 된다면 무엇을 배우거나, 혹은 찾아야 할까요? 

 

 세상은 설명으로 이루어지는 세계가 있고, 그 자체가 설명의 대상이 되는 세계가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면, 자 여기 꽃이 하나 있어요. 이 꽃을 말로 한번 설명해 보세요. 두꺼운 책에 활자를 가득 채워도 이 꽃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요? 없을 거예요. 뭔가 계속 부족함을 느끼겠죠. 그러나 두꺼운 책을 채울 만큼의 언어가 아니라 단 몇 마디만 했는데도 아예 꽃이라는 실체가 되어 버린, 혹은 그 몇 마디만 봐도 사람들이 꽃을 상상하며 오히려 더 많은 설명을 덧붙이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시는 사물 자체를 언어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형상화’한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단 한 줄의 시로 소녀를 표현해 버리면, 그 시 자체가 바로 소녀가 되어 버리죠. 
이것이 바로 형상화입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시입니다. *시는 사물 자체를 언어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형상화’한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것은 문학이나 시에서만 고유하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형상화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실체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하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 어떤 소녀가 있다고 하면, 이 소녀의 얼굴은 동그랗고 머리칼은 까맣고, 눈은 커다란데 반짝반짝하고…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소녀의 실체가 되진 않죠. 그런데 단 한 줄의 시로 소녀를 표현해 버리면, 그 시 자체가 바로 소녀가 되어 버리죠. 이것이 바로 형상화입니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이렇게 형상화를 잘할까요? 시인은 다른 말로 ‘견자(見者)’라고 합니다.

 

왜 시인은 이렇게 형상화를 잘할까요?
시인은 다른 말로 ‘견자(見者)’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천재 시인인 랭보가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시인 폴 드메니에게 보낸 *‘견자(voyant)의 편지’에서 이 견자라는 말이 처음 등장합니다. 랭보는 “시인은 의식적으로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얘기하지요. 견자란 단어 그대로 ‘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본 사람이냐, 남이 안 본걸 본 건데, 이것은 영감이 뛰어나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봤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이 사소하게 생각한 것을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카메라 렌즈를 통해 꽃을 보는 반면, 견자는 그 귀퉁이에 자라는 작은 풀 한 포기를 유심히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글에는 꽃이 아닌 풀이 등장합니다. 이 풀은 시인이 주목하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거죠. 하지만 시인이 그 풀 한 포기에 주목하는 순간,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성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견자란 사소함을 의미화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요.

 

풀은 시인이 주목하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거죠.
이처럼 견자란 사소함을 의미화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요.

 


브랜더가 만약 이런 견자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자동차 브랜드를 만드는 브랜더라면 원래 자동차에서 보아야 할 것인 성능의 우수성, 안전도, 가격, 디자인 등이겠죠. 그러나 견자의 시선을 가진 브랜더라면 단순히 ‘필요’에 의한 부분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것에 눈이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화되는 순간 사람들은 이때 보지 못한 낯선 것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브랜더가 만약 이런 견자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사소함 속에서 아주 특별한 가치를 발견해 내는 것 말입니다.  

 

 

재밌는 예를 들어 볼게요. 유치원에서 두 달 정도 실습 교사를 한 적이 있는데, 어떤 그림을 보여 주고 아이들에게 그 그림에 대해 말해 보라고 했어요. 보통 어른들은 그림을 전체적으로 조감하여 보지만, 아이들은 귀퉁이에 뭐 묻은 거, 선이 똑바로 안 그어지고 엉뚱하게 빗나간 것 등 너무나도 사소한 것을 읽어 내더군요. 물론, 아직 어린 아이라 조감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견자도 이와 같습니다. 사소함 속에서 독특하고 엉뚱한 것을 보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지요. 브랜더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견자의 시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소함 속에서 아주 특별한 가치를 발견해 내는 것 말입니다. 

 

*시는 사물 자체를 언어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브랜드도 시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가치를 형상화하여 제품 자체를 언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디자인 경영’ 특집에서 유니타스브랜드는 디자인 경영을 한다는 것이 단지 제품의 외형을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를 보이는 형태로 시각화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럼으로써 소비자 접점인 제품이 단지 제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브랜드가 디자인한다는 것은 제품의 형태가 아니라 가치를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유니타스브랜드 Vol.14 p268 참조). 

 

*랭보 ‘견자의 편지’
천재 시인 랭보는 ‘견자의 시인’으로 유명하다. 1871년 5월, 그는 학창 시절 자신의 멘토였던 조르주 이장바르와 자신의 습작 시절 힘이 되어 준 스승이자 친구인 시인 폴 드메니에게 각각 자신이 직접 쓴 시와 함께 편지를 보낸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예고하는 편지였다. 그는 “ 시인이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 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시인은 그 자신을 추구합니다”고 했다. 연금술과도 같던 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려는 그의 결연한 의지가 드러나 있다. 

 

 

UnitasBRAND *탐스슈즈라는 신발 브랜드가 있습니다. 이 브랜드의 창업자 블레이크 마이코스키는 아르헨티나의 빈민가에 갔다가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 아이들에게 신발을 신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생각이 발단이 되어 탐스슈즈라는 브랜드가 탄생했고, 신발 한 켤레를 사면 제3세계 아이들에게 한 켤레가 기부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생각해 보니 빈민가에는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견자의 시선으로 보았기에 블레이크에게는 그것이 더 날카롭게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결국 선한 브랜드의 표본이 되었고요. 

 

 원래 *과거 시인은 선지자나 예언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이것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그러한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시대의 흐름을 가장 빠르게 읽고 그것을 표현하는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읽고는 그 징후를 보여 주는 존재였죠. 그러나 현재 시는 소위, 소수의 엘리트들이 즐기는 장르가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연구하고 극소수의 애호가들만이 향유하는 문학이 되었죠. 그러나 시인이 과거에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시적 통찰력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탐스 슈즈도, 애플도 견자의 눈을 가진 브랜드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탐스 슈즈도, 애플도 견자의 눈을 가진 브랜드라고 봅니다. 특히 애플의 심벌,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는 놀랍습니다. 이 심벌은 소비자들이 애플에게 그 설명을 요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설명하게 하고, 해석하게 하지요.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사물 자체가 언어가 된 것입니다. ‘Think different’ 하면 굉장히 서술적이고 평범한 단어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보며 제각기 자신만의 연상을 하죠. 견자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본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전에는 없던 의미니까요. 창조한 것 아닙니까. 

 

BRAND Think 
*탐스슈즈

창업자인 블레이크 마이코스키가 신발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니즈만을 고려하여 비즈니스를 설계했다면 과연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슈퍼내추럴 코드’ 특집에서 만난 그는 견자로서 아이들의 상처와 어려움을 먼저 발견했으며, 구체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그 후에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비즈니스도 지속성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브랜드 창업자는 견자로서 브랜드를 통해 사소하게 넘길 수 있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유니타스브랜드  Vol.12 p32 참조).
 

 

 

기업은 브랜드를 표현하는 수단이나 홍보 문구로 시를 자주 인용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브랜드의 실체와 표현이 제각각이죠.

 

 

UnitasBRAND 견자의 시선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최초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브랜더에게 있어서 ‘*최초’ 만큼이나 매력적인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초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패가 담보되어야 하겠지요. 견자의 시선을 갖는 것 또한 단번에 될 수는 없습니다. 견자의 시선을 갖기 위해서 현재 브랜더들이 놓치고 있는 사소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먼저, 질문을 하나 드려 볼게요. 2000년대 한국 시단의 중요한 경향을 일컬어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만약 모른다면, 이 부분이 바로 브랜더들이 놓치고 있는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기업은 브랜드를 표현하는 수단이나 홍보 문구로 시를 자주 인용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브랜드의 실체와 표현이 제각각이죠.

 

키에르케고르의 멋진 말 중에 한 부분을 뚝 떼어 내서는 인문학에서 심오한 가치를 찾은 것처럼 생각하죠. 그것은 그저 ‘인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바로 시를 제대로 읽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죠.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아주 상식적이고 지루한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좋은 시집을 많이 봐야 합니다. 한용운이든, 윤동주든 좋은 시집을 끊임없이 많이 봐야 합니다. 그게 기본입니다. 우선은 시와 친해져야 하는 것이 급선무죠. 그래야 시의 세계가 무엇인지, 시적 통찰력이 무엇인지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브랜더들이 시를 읽고 견자의 눈을 가질 때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가장 먼저 알게 되겠지요.

 

 

시와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부터는 이렇게 공부하면 좋습니다. 앞의 질문의 답은 바로 *미래파인데요, 황병승 시인과 같은 시세계를 가진 사람들이죠. 미래파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고, 은유보다는 환유법을 쓰며, 아름답기보다는 그로테스크한 표현을 쓰는 시인들을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최신(up to date)의 시집을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오트 쿠튀르 시대의 흐름을 만들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출처: imaxtree.com

 

오트 쿠튀르에 등장하는 그 괴기한 옷은 꼭 누가 입어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은 시대의 흐름을 만들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거죠. 시는 시대를 읽어 내는 예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문학에서 시가 차지하는 위치는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합니다. 브랜더들이 시를 읽고 견자의 눈을 가질 때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가장 먼저 알게 되겠지요. 

 

BRAND Think 
*최초 

세계적인 마케팅 거장, 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가 《마케팅 불변의 법칙》에서 ‘최초의 법칙’을 다른 법칙들보다 우선 소개한 것도 그만 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상 블루오션 전략, 신시장 창조전략, 블랙홀 시장 창조 전략들도 시장의 최초가 되는 것이 마케팅, 브랜딩에 강력한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기에 고안된 전략 모델일 것이다. 물론 시장의 최초가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초가 되지 못했다고 지레 포기할 필요는 없다. 이미 누군가가 ‘최초’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면, 최초를 이기기 위해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그런데 최초도 아니고, 최고도 못 되는 상황이라면, 최초와 최고들의 최악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것 또한 최초가 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음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BRAND Think 
*브랜드의 실체와 표현이 제각각

브랜딩에 있어 늘 강조되는 것이 ‘브랜딩 얼라인먼트’다. 브랜드의 철학에서 비롯된 미션과 비전, 그리고 이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제품과 서비스, 이것이 보여지는 온·오프라인 공간, 뿐만 아니라 이를 고객 및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실행되는 전략과 전술들의 일관성, 이것이 바로 브랜딩 얼라인먼트다. 하지만 김갑수 문화비평가의 말처럼 브랜드의 실체와 표현이 제각각일 때가 많아 브랜드의 메시지는 왜곡되기 십상이다 (유니타스브랜드 Vol.17 p156 참조).

 

*미래파
1900년~1920년에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미래파는 19세기 사회의 전통적 모순에 대한 격렬한 반항을 예술을 통해 격정적으로 표현하려 한 저항 문학이자 예술운동이다. 이러한 흐름은 2000년대 우리나라를 강타한다. 이전 세대의 낡은 관습과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언어와 사물의 경계를 허물고, 환상과 현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미학적인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만의 주체 형성과 낯선 시풍으로 한국 시단의 쟁점으로 떠오른다. 미래파의 대표적인 시인 황병승의 시는 미래파의 시 중에서도 유독 해석하기 어려운 시로 꼽힌다. 낯선 구문과 엉뚱한 발상으로 문맥을 긴장감 있게 끌고 가지만 불연속적 문맥들로 인해 그 속에 숨겨진 관념들이 마치 김춘수의 시가 기존의 통념을 부정한 채 끊임없는 이미지의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 것과 같이 황병승의 시는 낯설고도 불연속적인 이미지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정재서 김갑수 성균관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후, ‘실천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데뷔했다. 그 후 KBS의 ‘문화 읽기’를 비롯하여 각종 매체 및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를 비롯, 삼성 SERI에서 ‘시가 있는 쉼터’ 강의를 했다. 현재는 MBC 라디오 ‘박혜진이 만난 사람’ 등 여러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다.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꿈꾸는 시인이자 음악과 커피를 사랑하는 문화평론가인 그는 지난 3년 동안 KTV의 ‘인문학 열전’의 사회를 진행하며 대중들에게 인문학 길라잡이가 되어 주었다. 주요 저서로는 《지구 위의 작업실》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세월의 거지》 등이 있다.


출처 : 유니타스브랜드 Vol 22 브랜드인문학 유니타스브랜드 SEASON 2 Choice 
- Ш. Literature)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인문학은 왜 김갑수여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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