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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힘, 브랜드의 미학

브랜딩/브랜드 인문학, 인문학적브랜드

by Content director 2022. 5. 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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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terview with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명예교수 박정자

 

‘광기의 역사가 미셸 푸코와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장 폴 사르트르에 관해 한평생을 연구했던 분’이라는 박정자 교수의 이력은 인터뷰를 주춤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상컨대, 질문 한 개당 답변을 듣는 시간이 30분은 족히 될 것이기 때문이다. 1회 인터뷰를 진행할 때 평균 2시간이 소요되니, 3~4개의 질문밖에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경우, 추후 인터뷰 내용을 정리할 때를 미리 생각하며 인터뷰이에게서 모든 것을 끌어낼 단 하나의 좋은 질문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보름 정도가 지난 오늘, 그날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다소 무례한 표현일지는 모르나, 박 교수는 수줍은 철학전공 석사 3학기 학생 같았다. 인터뷰 중 브랜드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노트 필기까지 하면서 무척이나 재미있게 들어주셨다. 그리고는 당신의 지식으로 최대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친절하게 나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해 주셨다. 하지만 궁금한 점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뒤바뀌는 상황이 펼쳐졌다. 날카롭고 직선적인 관점으로 나의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아주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인터뷰 중반에는 마치 아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설명하는 어머니와 같았다. 철학의 용어 중 어려운 개념이 나왔을 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 금세 그것을 알아채시고는 나의 눈높이에 맞춰서 다시 한번 설명을 해주셨다.

인터뷰 끝에는 석사논문의 소주제에 대한 힌트를 얻은 듯한 눈빛으로 “나는 원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라고 활짝 웃으셨다. 결국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인터뷰 내내 나는 푸코의 왼쪽 눈과 사르트르의 오른쪽 눈으로 바라보는 입체적인 세상을 지혜로 충만한 어느 겸손한 큐레이터의 도움을 받아 관람한 기분이었다. 특히 애플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인터뷰 전 애플에 대한 질문을 하고자 미리 자료를 건넸었다) 자료를 검토하고 공부하는 내내 자신이 연구했던 지식들이 ‘브랜드’로 분해 나온 것 같다면서 신이 나신 듯 말했다. 급기야 지금 애플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서 준비하신다는 게 아닌가.

 

《시선은 권력이다》라는 그녀의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시선은 타자와의 관계이고, 나와 세계를 맺어주는 기본적인 매체이다. 따라서 시선이 인간관계의 기본인 권력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읽어 보았다.

 “브랜드는 타자와의 관계이고, 나와 세계를 맺어주는 기본적인 매체이다. 따라서 브랜드가 인간관계의 기본인 권력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박 교수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가 브랜드를 통해 인문학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듯, 나도 인문학을 통해 브랜드를 보는 관점을 하나 더 얻게 된 셈이다.

 


“브랜드는 타자와의 관계이고, 나와 세계를 맺어주는 기본적인 매체이다.
따라서 브랜드가 인간관계의 기본인 권력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아름다움의 
이율배반적 조건 

 

UnitasBRAND 유니타스브랜드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특집 중의 하나가 ‘디자인 경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브랜드에게 있어서 ‘디자인이 권력이다’ 라고 할 정도로 디자인은 이제 브랜드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미학’을 공부하시는 교수님과의 만남이 의미가 있을 듯한데요. 미학(美學), 한문으로 뜻풀이를 해보면,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이지 않습니까. 사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학에서 ‘아름답다’라고 칭하는 게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박정자 교수(이하 '박') 혹시, 언제 아름답다고 말하세요? 장미꽃을 보면서 “Beautiful!”하고, 아름답다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 그 장미꽃이 어떤 기준이나 조건에 부합되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장미꽃이 이러저러한 개념에 맞으므로 아름답다고 인정된다, 하지 않죠. 그냥, 말 그대로 정말 아름다운 거지요. 이처럼 아름답다라는 건 아름답기 위한 어떤 개념을 전제하지 않아요.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것이 ‘있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아주 독특한 개인적인 취향이나 개성에 따라 특정한 것에 대해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일하게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거예요.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모두가 동의하는 아름다움의 코드가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거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칸트의 질문이었어요. 
 

 

 

분명, 아름답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한다, 라는 건 없는데 왜 사람들은 동일하게 어떤 것에 대해 모두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걸까요? 모두가 동의하는 아름다움의 코드가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칸트의 질문이었어요. 잘 알다시피 아름다움을 철학적 주제로 가지고 온 선구자가 *칸트였잖아요. 그는 아름다움을 연구하면서 ‘분명 아름다움은 주관적인데, 그렇다고 반드시 주관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는 이율배반적인 명제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이 모순된 명제를 이렇게 풀어나가죠.

 

칸트는 사람들의 감성에도 보편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공통감(sensus communis)이라고 한다.

 

이성적 혹은 논리적으로 얘기할 수 없는 관념적인 것에도 ‘원리’가 있다고 말입니다. 칸트는 감성적인 부분에서 사람들이 동일하게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감성에도 ‘보편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해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칸트의 ‘*공통감(sensus communis)’이에요. 아름답다는 것은 바로 이 공통감을 획득했을 때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내가 “이 꽃이 아름답다”라고 얘기할 때는 ‘나’라는 개인이 말하는 거지만 이것은 모두가 이 꽃은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거죠.

 

 

*칸트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서구 근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칸트의 철학을 흔히 비판철학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의 ‘비판’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되묻는 것을 뜻한다. 이런 면에서 그의 철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계몽주의적 주체의 철학이다. 그래서 칸트의 미학 역시 우리의 판단력 구사에 관한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칸트는 그의 미학 이론에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는 미적 판단력이 주어져 있다고 하며, 《판단력 비판》에서 욕망 없는 쾌락에서 미적 판단력이 더 크게 발휘된다고 말한다. 칸트는 미학의 주체 문제를 ‘미는 무엇인가’라는 전통적인 문제에서 ‘심미는 무엇인가’로 변화시킴으로써 근대 심미심리학의 시작을 알렸다. 칸트는 ‘미의 분석’ 외에도 ‘숭고의 분석’, 예를 들면 예술, 천재, 심미 이미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유희설’, ‘표현설’, ‘형식설’ 등과 같이 근대 미학에서 성행했던 많은 관점들은 모두 칸트 미학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공통감(sensus communis)

칸트의 미학은 근대 미학의 핵심이다. 그가 말하는 미학 이론은 서로 모순되는 두 명제가 동등한 타당성을 가지고 주장되는 ‘이율배반’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적 판단은 개념에 근거하지 않는 주관적 사고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 칸트 미학의 핵심은 이 주관적 사고에 보편성이 있다고 여긴 데 있다. 주관적 사고라는 것에 보편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미를 판단하는 필연적인 능력의 원리를 밝히고자 한 것이 칸트 미학의 중심 이론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판단에 대해 동의하는 필연성’이라는 뜻의 ‘공통감’ 을 설명하며 칸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일치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과 심미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칸트는 공통감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에 ‘당연히’라는 의미를 가질 권리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지만 또한 보편성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칸트는 감성적인 부분에서 사람들이 동일하게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감성에도 ‘보편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해요. 

 

 

UnitasBRAND 우리가 시쳇말로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하잖아요. “사람 눈은 다 똑같아.” 이 말이 바로 칸트가 말한 공통감이 아닐까 하는데요. 그러니까 감성적인 보편성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것,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이 비슷비슷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신이 인간의 마음 안에 아름다움을 보았을 때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끼게끔 무언가를 프로그램 해 놓은 것 같은데요.

 

네, 칸트도 그 부분을 풀어보려고 한 거예요. 칸트는 아름답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그 대상이 우리의 상상력과 개념을 구성하고 사유하는 능력을 말하는 *오성(悟性, understanding)과 일치했을 때 느끼는 쾌감이라 말합니다. 칸트는 말하죠. 색깔이 예뻐서 아름다운 거냐, 형태가 예뻐서 아름다운 거냐, 다 아니다. 우리 마음에 무언가와 딱 ‘적합성’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쾌감을 느끼며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이때 우리 마음과 적합성을 이루었다는 게 바로 상상력과 오성과의 일치를 말하는 거예요. 이런 맥락에서 칸트는 *아름다움은 ‘무관심(disinterested)’에서 본능적으로 느끼는 거라고 얘기해요.

 

 

칸트는 우리 마음에 무언가와 딱 ‘적합성’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쾌감을 느끼며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폴 세잔느가 그린 유명한 그림인 사과 시리즈를 보며 우리는 아름답다고 하죠. 하지만 사과가 실제로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한 건 아니잖아요. 그 사과가 세상에 있건 없건, 존재의 실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그냥 아름다운 거예요. 분명, 그 존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상태인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겁니다. 이런 것이 바로 무관심인데요, 정확히 말하면 대상에 대한 무관심이죠. 칸트는 미의 조건을 이 무관심이라고 했어요. 대상에게 무관심한 상태인데 아름다움을 느끼는 거라면, 무관심이란 구체적으로 뭘까요? 바로 나의 사적인 조건을 훌쩍 뛰어 넘은 거예요. 만약, 내가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이 무관심하게 보이지 않았겠죠.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관찰하면서 내가 가진 조건에 부합하는지 살펴보지 않겠어요?

 

 

무관심이란 구체적으로 뭘까요? 바로 나의 사적인 조건을 훌쩍 뛰어 넘은 거예요. 

 

 

하지만 아름다움은 온전히 대상에게 무관심한 상태에서 느끼는 쾌감이죠. 무엇보다 개개인의 사적인 조건을 다 초월한 것이기에, 그것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감성인 거예요. 이것을 바로 칸트가 공통감이라고 말한 겁니다. 이러한 칸트의 공통감은 이후 *쇼펜하우어로 이어지면서 오늘까지 미학에서 다루고 있는 아주 중요한 의미예요.

 

그런데 미학에서는 이것 말고 요즘 화두가 되는 것이 하나 있어요. 바로 숭고입니다. 근대시대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이성이었어요. 모든 것을 이성으로 설명했죠.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넘어오면서는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상을 보게 된 거예요. 숭고란, 어떤 것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거거든요.

 

*오성
오성이란 넓은 의미에서는 사고능력을 일컫는 말이며 일반적으로는 감성과 반대되는 개념인 이성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칸트는 오성이란 인간의 상상력과 관계 있는 것으로, 지각에 기초하여 눈앞에 현존하지 않아도 기억에 의해 그 상이 의식 속에서 재생되어 표상을 만들어 내는 인식 작용이라고 하여 감성적 소여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성립시키는 능력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오성은 수많은 개별 장미꽃을 통합하여 공통적인 개념의 장미꽃이라는 표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무관심’에서 본능적으로 느끼는

칸트는 ‘꽃은 아름답다’라는 미적 영역에서의 판단에 대해 그 특이성을 말하고 있다. 일반적인 인식은 ‘이 물체의 표면은 매끄럽다’는 식의 판단으로 일정한 법칙을 전제하는 데 반해 미적 판단은 이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어떤 것이 아름답다는 것은 법칙적 인식의 사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아름다움의 표준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데 칸트는 이러한 판단을 ‘개념에 따라 구성되지 않는 판단’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미적 판단으로 매우 주관적이며 어떤 목적을 두고 바라보는 관심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이를 두고 취미 판단이라는 미적 판단을 설명하는데 이를 통해 논리적 판단이나 도적적 판단을 근거로 한 보편성이 아닌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 모두에 대해 타당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주관적 보편성을 취미 판단의 고유한 보편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쇼펜하우어

관념을 넘어선 경험적 판단을 중요한 측면으로 생각한 관념론적 미학을 창시한 칸트의 이론은 이후 쇼펜하우어에 의해 발전된다. 현대 의지론의 시조인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미는 의지의 객관화이고 예술은 인간을 세속의 고난에서 구제하는 임시수단이다”라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이 학설은 재현과 모방을 부정하고 표현을 중시하며 인식과 이성을 부정하고 체험을 중시한 당대 미학의 효시가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미의 객관성에 대해서 주관적 의지의 객관적 표상이라고 생각했다. 즉 칸트의 이론이 쇼펜하우어에 와서는 어느 대상의 미는 어느 사람의 미적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결과로 그 대상에 부관된다는 ‘미적 태도론’으로 귀결되며 이러한 미적 의식에 대한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근대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상을 보게 된 거예요.
숭고란, 어떤 것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거거든요.

 

 

UnitasBRAND 숭고라, 왠지 모르게 의미심장한 단어처럼 여겨집니다. 우리가 숭고하다고 얘기할 때는 무언가 고결하고,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닌 대상으로 보았을 때인 미학에서 이 숭고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척 뜻밖입니다. 

 

 제가 강의하고 있는 학교의 다음 학기 주제이기도 한데요, 칸트 미학에 있어서 미적인 것과 더불어 숭고한 것은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앞서 말한 것은 미적인 것에 해당하는 거예요. 미학에서 숭고라고 했을 때는 말씀하신 것처럼, 흔히 우리가 말하는 숭고의 의미와는 조금 달라요. 우리는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 앞에서 그 크기에 압도되죠. 그런가 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인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에 들어갈 때면 그 크기와 엄숙함에 압도되어 당혹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혹은 높은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보면 거기에 순간 압도되지요.

 

St. Peter's Basilica www.viator.com

 

이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숭고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대상 앞에서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는 것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절대적인 크기나 어마어마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보잘 것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 눈앞에 펼쳐진 것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죠. 이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숭고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대상 앞에서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는 것 말입니다. 이 숭고로움도 미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숭고로움을 느끼는 전제 조건 따위는 없어요. 이것도 그냥,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지요. 하지만 미적인 것과는 정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미는 아까 말했듯 기본적으로 쾌감이에요. 무언가를 보았을 때 느끼는 기분 좋은 느낌이죠.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그 앞에 바싹 다가가 다시 한번 그것을 보지요. 그래서 칸트는 아름다움을 적극적인(positive) 쾌감이라고 얘기합니다. 반면 숭고는 소극적인(negative) 쾌감이에요. 해일처럼 무섭게 달려오는 파도를 볼 때 우리는 파도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기보다는 아예 멀찌감치 물러서서 바라보잖아요.

 

숭고는 파격적인 것이며, 의외적인 거예요. 무엇보다 이때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기에
아름다움을 보았을 때 작동하는 상상력과 오성을 마비시켜버려요.

 

 

어떨 때는 두려움까지 느끼죠. 하지만 조용하게 관조하기 보다는 가슴이 떨리는 듯한 역동적인 감동을 받죠. 그래서 칸트는 숭고는 처음에는 쾌감보다는 오히려 불쾌함에 더 가까운 감정이지만 이후에는 미적인 것에서 느끼는 감동보다 훨씬 더 큰 쾌감을 느끼는 것이 숭고라고 얘기합니다. 이처럼 숭고는 파격적인 것이며, 의외적인 거예요. 무엇보다 이때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기에 아름다움을 보았을 때 작동하는 상상력과 오성을 마비시켜버려요.

 

그런 의미에서 숭고는 아름다움의 최고인 겁니다. 

 

 

그래서 숭고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얘기한 거예요. 영어로 하면은 present 할 수 없는 것, 그니까 unpresentable 한 것, 또는 demonstrate 할 수 없는 것, 그래서 represent 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칸트는 십계명에 보면 제 2계명인 “너는 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는 구절을 숭고함의 극치로 꼽습니다. 숭고는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든 흉내 내어 만들어낼 수 없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숭고는 아름다움의 최고인 겁니다. 그래서 이 숭고론을 가장 먼저 얘기했던 그리스의 수사학자 *롱기누스의 《숭고한 문체에 대하여》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가장 훌륭한 말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거죠. 너무나 숭고하니까. 

 

숭고는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든 흉내 내어 만들어낼 수 없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숭고는 아름다움의 최고인 겁니다. 

 

BRAND Think 
*
숭고

감히 ‘숭고한’이란 형용사를 앞에 두어도 어색하지 않은 브랜드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쩌면 아직 우리는 진짜 ‘브랜드’라 부를 수 있는 브랜드를 만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그 이유는 브랜드의 어원을 살펴볼 때 더욱 선명해진다. ‘브랜드(brand)’의 어원은 ‘낙인찍다(burn)’인데 낙인을 찍는 이유는 ‘구별’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구별’이란 단어가 묘하다. ‘구별’이란 단어를 히브리어에서 찾아보면 ‘거룩(holy)’이라는 단어와 어원과 어근이 같은 ‘카도쉬(kadosh)’로 표현된다. 즉 거룩한 것은 구별된 것이고, 구별된 것은 거룩한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브랜드는 다른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그 무엇, 때로는 거룩하리만큼 경외감이 느껴지는 그런 대상에게만 붙일 수 있는 작위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브랜드라면 숭고함마저 느껴질지 모른다. 독일의 철학가 발터 벤야민의 예술 이론에서 언급한 ‘아우라(aura)’, 즉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내뿜는 브랜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것이 박 교수가 말하는 숭고한 브랜드, 달리 말해 소극적 쾌감을 선사하는 브랜드 아닐까?
설령 숭고함은 인간의 피조물로는 자아낼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한들, 이것을 목표로 도전할 수는 있지 않을까? 

 

*롱기누스의《숭고한 문체에 대하여》

칸트에 의해 숭고이론이 시작되었지만 숭고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끌어들인 최초의 시도는《숭고한 문체에 대하여》에서였다. 오랫동안 이 책의 저자는 3세기 그리스의 수학자였던 롱기누스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실제 이름은 미상이며 롱기누스라는 가명을 쓴 1~3세기 희랍의 수학자가 썼을 것이라는 것이 최근의 설이다. 이 저서는 17세기에 프랑스 고전주의 이론가 부알로에 의해 번역 출간됨으로써 천 육백 년 만에 숭고에 대한 관심이 다시 뜨거워졌다. 이로 인해 18세기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가 《미와 숭고함에 대한 시론》을 출간하는데 칸트는 이 저서의 영향을 받아 《미와 숭고함의 느낌에 대한 고찰》과 《판단력 비판》을 출간하며 숭고에 대한 이론을 전개한다.

 

 

진정한 의미의 브랜드는 다른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그 무엇,
때로는 거룩하리만큼 경외감이 느껴지는 그런 대상에게만 붙일 수 있는 작위인 셈이다. 

 

 

애플, 
들뢰즈를 만나다

 

UnitasBRAND 우리가 어떤 브랜드를 보았을 때,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숭고함을 느낄 수 있는 브랜드는 어떤 것일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갑자기 숙연해집니다. 이 아름다움을 얘기할 때 사실, 브랜드에서는 애플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왜냐면 사람들이 애플을 처음 접할 때 느끼는 감정이 다름 아닌 ‘아름답다’거든요. 교수님께서는 애플을 보셨을 때의 감정이 어떠셨나요? 숭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미학을 연구하는 분으로서 애플은 어떤 제품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애플도 칸트의 ‘공통감’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면, 공통감이라는 것이 쉽게 말해 감성에 들어있는 보편성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아름답다고 느낄 때는 다른 사람도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것이 형성될 수 있어요. 그래서 타인에게 이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라는 요청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애플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우 애플이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디자인 관점에서 최고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니?’라고 스스럼없이 묻지요.

 

 

생각해보세요. 자기만 좋으면 된 거지, 다른 사람들도 좋을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애플은 다른 사람들도 애플의 디자인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거라는 믿음이 있죠. 그런 의미에서 애플의 디자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름답다는 동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칸트가 지칭한 공통감이 들어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실, 제가 애플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디자인보다도 다른 거예요. 하나는 시뮬라크르고, 다른 하나는 노마디즘입니다.

 

애플의 디자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름답다는 동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칸트가 지칭한 공통감이 들어있기 때문이죠. 

 

UnitasBRAND 미학이라는 것이 예술철학이다 보니, 교수님도 철학자의 시선으로 애플을 바라보시는군요. 지금 말씀하신 시뮬라크르나, 노마디즘은 사실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사회를 표현하는 중요한 개념들이죠. 0과 1이라는 숫자로 무한대로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시대에, 게다가 글로벌화에 발맞추어 기기들의 이동이 용이해졌죠.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사회를 분석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시뮬라크르와 노마디즘인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 두 개의 개념은 사실,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지요. 그런데 제가 오늘 얘기하는 이 두 가지의 개념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들뢰즈가 얘기한 개념인데요. 우리가 알고 있는 *시뮬라크르의 경우는 플라톤이 얘기한 이데아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죠. 잘 알고 있다시피, 플라톤은 ‘원본’이라 불리는 이데아가 있다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애플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디자인보다도 다른 거예요.
하나는 시뮬라크르고, 다른 하나는 노마디즘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이 이데아를 복사한 것이라고 했죠. 그런데 시뮬라크르는 얼핏 보면 원본을 복사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닮지 않은(dissimilarity)것을 말하죠. 그래서 이데아를 일차적 존재라고 한다면, 사본은 이차적 등급이며, 시뮬라크르는 삼차적 등급이에요. 이런 논리에서 시뮬라크르는 하찮은 존재이며, 극단적으로 말해 존재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취급받았죠.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현상계의 이미지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것,
환영(phantasm)으로 치부하며 원본적이며 모범적인 진리라고 일컫는
이데아를 상실하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른바 ‘플라톤의 전복’을 외치면서 시뮬라크르의 의미를 회복시킵니다. 그는 기존에 허황된 환영이라 치부되었던 시뮬라크르는 단지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것 자체로도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거죠. 이것은 원본과 사본만이 인정받는 기존 질서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기원적인 것, 원본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위험일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플라톤의 말대로라면 앤디워홀의 그림은
모두 존재 가치가 없는 삼등급의 시뮬라크르에 불과한 거죠. 

 

 

기원이나 원본만이 의미 있는 것으로서 그 정당성을 부여받을 경우, 결국 그것이 아닌 것은 열등한 주변부로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들뢰즈가 시뮬라크르를 회복한다고 했을 때는 그러나 단순히 삼등급에서 그 등급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원본 자체를 파괴시켜버리는 겁니다. 들뢰즈가 반(反) 플라톤주의를 선언하는 그 시점을 기점으로 팝아트 문화가 꽃피웠고, 가상현실의 시대가 펼쳐졌죠. 사실 플라톤의 말대로라면 앤디워홀의 그림은 모두 존재 가치가 없는 삼등급의 시뮬라크르에 불과한 거죠. 

 

앤디워홀의 작품들

*시뮬라크르

시뮬라크르는 프랑스어로 흉내, 시늉 등의 뜻으로 가상, 거짓 등의 뜻을 가진 시뮬라크룸(simula-crum)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현상계의 이미지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것, 환영(phantasm)으로 치부하며 원본적이며 모범적인 진리라고 일컫는 이데아를 상실하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질 들뢰즈는 오히려 플라톤의 기원적이며 원본적인 것에 대한 추구의 위험성과 기존 철학이 주장하는 모범적 기원으로의 회귀를 부정한다. 서강대 철학과 서동욱 교수는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데아의 개념으로 보았을 때 원형적인 인종은 백인이며 원형적인 성은 남성이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기원이 누리는 영광의 배후엔 늘 기원보다 열등한 주변부인 유색인종, 혼혈아, 불법 이민자와 같은 이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교수는 시뮬라크르에 대한 들뢰즈의 긍정은 곧 순수한 원형적 모범의 기준을 벗어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환대를 담고 있다고 얘기한다.

 

르네 마그리트와 그 작품들 

 

*들뢰즈가 말한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잘 표현한 작가

시뮬라크르를 회화에 적용해서 이해해보면 모델을 충실하게 복사한 그림이 ‘원본과 유사(類似)’의 관계이고, 모델과는 아무 상관없이 복제품끼리 서로를 닮아가며 반복한 이미지들은 ‘상사(相似)의 관계’, 즉 ‘시뮬라크르’이다. 예를 들어, 모나리자는 16세기 이탈리아의 한 여인이라는 비슷하게 모사한 사본이다. 반면, 앤디 워홀은 애초부터 복제품이었던 어떤 사진을 색깔만 다르게 하며 조금씩 다르게 변화시키며 마릴릴먼로 시리즈를 만든다.

들뢰즈는 앤디워홀의 작품을 ‘차이와 반복’의 미학이 구현된 시뮬라크르가 잘 표현된 예술작품이라 지지한다. 현대 사회 들어서는 마그리트 작품이 대중의 감성에 부합하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데 박정자 교수는 이를 두고 마그리트 작품에는 시뮬라크르라는 코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마그리트의 작품에는 밝고 역동적인 시뮬라크르와 부정적인 가상의 세계인 시뮬라크르가 동시에 공존하여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들뢰즈가 말한 시뮬라크르는 어찌 보면 원본이란 의미가 없다는 것이겠네요.
이 말에 어느 정도 동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현재의 사회나 문화는 정말 원본이나 기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혼재되어 있지요.

 

 

 

UnitasBRAND 그러니까 들뢰즈가 말한 시뮬라크르는 어찌 보면 원본이란 의미가 없다는 것이겠네요. 이 말에 어느 정도 동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현재의 사회나 문화는 정말 원본이나 기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혼재되어 있지요. 앤디 워홀의 작품을 우리가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들뢰즈가 시뮬라크르를 회복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들뢰즈의 관점을 통해 우리는 애플을 어떻게 볼 수 있는 건가요?

 

 앤디 워홀 뿐만 아니라 저는 마그리트만큼 *들뢰즈가 말한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잘 표현한 작가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골콘다’에서 어떤 것이 원본인가요? 모두 시뮬라크르예요. 그럼 이건 하찮은 건가요? 아니잖아요. 들뢰즈가 말한 시뮬라크르는 주종관계가 없어요. 그러니까 원본이 주라면 사본은 종이라는 그런 개념이 없어요. 모든 것이 평등해요. 다만 차이가 날 뿐이죠. 여기에서 들뢰즈는 ‘*노마드적 분배’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어요.

 

들뢰즈가 말한 시뮬라크르는 주종관계가 없어요.
그러니까 원본이 주라면 사본은 종이라는 그런 개념이 없어요. 

 

들뢰즈는 그의 책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적 분배에 대한 이렇게 얘기해요.

“…그것은 유목적이라 불러야 하는 분배로서, 소유지도 울타리도 척도도 없는 유목적 노모스다. 여기서는 더 이상 미리 배당된 몫은 없다. 차라리 제한되지 않은, 혹은 적어도 명확한 한계가 없는 열린 공간 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분배하는 자들의 할당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분배를 말할 때 보통 정주민의 분배라고 하면 반드시 위계가 있어요. 최고 권력자가 하나 있고, 권력자가 그 밑에 여러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들뢰즈가 말한 노마드적 분배라는 것은 위계질서에 따른 분배가 아니에요. 그래서 권력자는 필요 없어요. 하지만 모두가 평등하게 나눠가져요.

 

박정자 교수는 애플의 앱스토어는 시뮬라크르와 노마드적 분배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으로 저는 애플의 앱스토어를 봤어요.
앱스토어는 시뮬라크르와 노마드적 분배를 모두 가지고 있더군요. 

 

 

이런 관점으로 저는 애플의 앱스토어를 봤어요. 앱스토어는 시뮬라크르와 노마드적 분배를 모두 가지고 있더군요. 앱스토어에서 사람들은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죠.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다운로드 받아요. 이미 원본은 해체되고 말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앱스토어는 시뮬라크르의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죠. 또한 앱스토어 안에서는 애플이 권력을 가지고 분배를 해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 안에서 각각의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들이 *자신이 노력한 만큼 수익을 가져가잖아요. 노마드적 분배의 개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거지요.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회에서 들뢰즈는 근대시대에서 소외받았던 사람들,
소수자들, 약자들의 권리를 모두 회복시키는 주장을 하는 철학자예요. 

 

 

들뢰즈의 철학을 이 시대의 사람들이 주의깊게 보는 이유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회에서 들뢰즈는 근대시대에서 소외받았던 사람들, 소수자들, 약자들의 권리를 모두 회복시키는 주장을 하는 철학자예요. 그래서 그가 주장하는 이론으로 사회를 해석하고, 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어요. 단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차이’잖아요. 모든 가치는 차이에서 나온다고 그러지요. 바로 들뢰즈의 핵심 키워드 중의 하나죠. 인터뷰 전에 유니타스브랜드에서 준 애플에 관한 자료를 보면서 들뢰즈가 얘기한 시뮬라크르와 노마드적 분배라는 개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애플에 대해서 더 연구해보고 싶어지더군요. 아직까지 많은 논의가 된 건 아니에요. 저의 다음 책 주제가 유니타스브랜드 덕분에 이것이 되어버렸네요. 

 

*노마드적 분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노매드(nomad)를 언급한다. 노마드는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가는 창조적 행위이다. 아탈리의 노마드 개념이 울타리 속에 가축들을 가두어놓듯 존재자를 가두었다면, 들뢰즈의 노마드적 개념은 어떤 개념의 울타리도 없이 존재자들을 방목하고자 했던 것이다. 들뢰즈의 노마드는 구축된 질서와 조직의 시스템과 영토에 대해서 자유롭다는 특징이 있다. 즉, 들뢰즈가 정의하는 노마드 개념에서 나온 ‘노마드적 분배’는 닫혀진 구역 안에서 행해지는 배분이 아니라, 미리 경계도 정해진 좌표도 없이, 그러나 가능한 범위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분배이다. 예를 들어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는 양 떼의 분배처럼 닫힌 공간에서의 질서와 조직의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닌 열린 공간에서의 가변적인 무한분할을 의미한다.

 

BRAND Think 
*자신이 노력한 만큼 수익을 가져감
올해 7월경 애플은 앱스토어에서 소비자들이 다운로드를 실행한 누적 횟수가 150억 번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앱스토어의 앱 개발자들은 1년에 99달러의 등록비를 애플에 내고 개발한 앱을 등록하며 유료앱으로 낸 수익의 70%을 얻게 된다(30%는 애플에 수수료로 지불한다). 애플이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현재까지 앱스토어에 등록된 앱의 개수가 40만 개를 넘어선 것을 감안한다면 현재까지 개발자들의 순수익은 한화로 약 3조 원 가까이 될 것으로 예상되며 애플의 수수료 수익도  1조 원 이상으로 점쳐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차이’잖아요.
모든 가치는 차이에서 나온다고 그러지요.
바로 들뢰즈의 핵심 키워드 중의 하나죠. 

UnitasBRAND 교수님의 다음 책이 나오면 다시 인터뷰를 해야 할 것 같군요. 만약 들뢰즈가 스티브 잡스였다면 어떤 브랜드가 나올까, 하는 주제도 매우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앱스토어는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전에는 없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든 거죠. 앱스토어가 나오자마자 구글이 안드로이드 마켓을 만들었다는 것은 앱스토어가 새 시대의 새 마켓이라는 것을 동의한 거니까요. 애플은 앱스토어도 물론 획기적인 혁신이지만, 사람들을 집이나 오피스 밖으로 나오게 한 것도 혁신이었죠. 물론, IT기술의 발전과 함께 얘기해야 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사람들을 공간 밖으로 탈출하게 한 거잖아요. 

 

박 맞습니다. ‘노마드’는 들뢰즈도 얘기했지만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가 얘기한 개념이기도 하지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마드에 대한 개념은 아탈리의 것이에요. 아탈리는 ‘*전자 노마드’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이렇게 말하잖아요.

“요즘의 젊은이들은 전자 노마드다. 전자기기들을 들고 다니면서 회사에 출근할 필요도 없이 아무 곳에서나 전자기기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국경도 필요 없는 그런 시대 됐다.”

 

제가 한 칼럼을 봤는데, 재미있는 문구를 봤어요. 서구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신종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It should be Mobile”이에요. 직역하면 “모바일을 해야만 돼!”이겠죠. 모바일을 중요시하는 것은 젊은이들이지 나이든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에 다음 세대인 젊은이에 대한 핵심 코드가 들어가 있는 거죠. 이제 모든 기기 중에서 이제 모바일은 가장 우위에 있어요.

 

It should be Mobile 말에 현대의 트렌드가 압축되어 있다. 모바일, 그것을 대표하는 휴대폰이야 말로 가장 대표적인 현대사회의 상징이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TV도 제쳐버렸으니까요. 모바일이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는지, 단적인 예를 말씀드리죠. 돌잔치에 가면 돌잡이 물건으로 휴대폰이 올라와 있어요. 그런가 하면 어린 아이들이 떼를 쓰며 울 때 휴대폰을 주면 울음을 딱 멈추죠. 이제 어린아이들도 본능적으로 모바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거예요. ‘It should be Mobile.’ 이런 말에 저는 현대의 트렌드가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이 되요. 모바일, 그것을 대표하는 휴대폰이야 말로 가장 대표적인 현대사회의 상징이죠.

 

 

‘디지털 노마드’ 지역적 경계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관심과 흥미를 같이 누리거나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도 만난다. 

 

 

*전자 노마드 프랑스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는 21세기를 ‘유목민 노마드의 시대’로 규정한다. 인간이 일찍이 1만년 동안 구축해 온 농경사회 중심의 정착 문명은 와해되고 세계 이곳 저곳을 떠도는 유목민들이 만드는 유목 문명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아탈리는 인류의 역사가 각종 디지털 제품을 장착해서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디지털 노마드’의 세계로 막 접어들었다고 한다. 

 

 

아탈리는 또한 이런 ‘이동’ 이야 말로 인간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고 하며 
현대사회에서는 ‘이동’이 매우 중요한 생존전략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디지털 노마드’는 아탈리가 처음으로 만든 말로서 이들은 컴퓨터 이외에 디지털 장비를 활용하여 인터넷이 만들어 낸 가상 영토에서 유목하는 삶을 즐긴다. 이들은 지역적 경계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관심과 흥미를 같이 누리거나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도 만난다. 아탈리는 또한 이런 ‘이동’ 이야말로 인간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고 하며 현대사회에서는 ‘이동’이 매우 중요한 생존전략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시각에서 
촉각으로, 

그리고 브랜드 

 

UnitasBRAND 모바일이 현대사회의 상징이라는 것은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저희도 ‘온 브랜딩(ON-Branding)’이라는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며 인터넷 공간에서 어떻게 브랜딩을 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았죠. IT기술은 모든 공간을 24시간 동안 ‘ON’되어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모바일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IT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니까요.

오늘 교수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제 아이폰을 켤 때마다 들뢰즈가 생각날 것 같습니다. 

 

 들뢰즈의 관점으로 애플을 연구해서 빨리 책을 내고 싶네요. 그런데, 애플을 보면서 한 가지 더 생각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트렌드 전문가인 *존 나이스비트가《메가트렌드》라는 책에서 앞으로의 트렌드라고 말한 세 가지가 있었잖아요.

 

 

여기에서 제가 주목했던 것이 ‘감성’이었는데요.
이 감성적인 부분을 ‘*촉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가 여성(female), 두 번째가 감성(feeling), 마지막으로 가상(fiction)이었죠. 이 모든 것이 지금 다 실현이 됐어요. 여기에서 제가 주목했던 것이 ‘감성’이었는데요.이 감성적인 부분을 ‘*촉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이폰, 아이패드 모두 촉각을 사용하는 거잖아요. 감각이 달라진 거예요. 그리스 이래 얼마 전까지는 시각이 중요한 시대였죠. 하지만 시대는 점점 촉각이 중요한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죠. 이것은 사실 페미니즘 쪽에서 많이 하는 얘기 중의 하나이기도 해요.

 

 

시각이라는 것은 *원근법적인 사고잖아요.
그러니까 시각은 보는 대상이 있고 보아짐을 당하는 대상이 있어요. 
촉각의 시대는 어떤가요? 촉각이란 거리감이 없어요. 주체와 객체와 딱 붙어야만 되는 거거든요. 

 

시각이라는 것은 *원근법적인 사고잖아요. 그러니까 시각은 보는 대상이 있고 보아짐을 당하는 대상이 있어요. 여기에서 보는 대상은 주체이고, 보임을 당하는 대상은 타자죠. 주체와 타자는 언제나 거리감이 생기죠. 그래서 페미니즘에서는 이것을 남성중심적 사고로 얘기합니다. 남성이 주체고, 여성은 타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촉각의 시대는 어떤가요? 촉각이란 거리감이 없어요. 주체와 객체와 딱 붙어야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촉각이라는 것을 페미니즘에서 얘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주체와 객체의 동일함, 혹은 동등함이 필연적으로 성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애플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촉각의 시대를 열었다는 거예요. 이러한 사회에 대해 미리 예측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애플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촉각의 시대를 열었다는 거예요.
이러한 사회에 대해 미리 예측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존 나이스비트가 《메가트렌드》라는 책에서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1982년 저서 《메가트렌드》를 출간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대한 흐름’이라는 ‘메가트렌드’의 개념을 제시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예측이 현실화되며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21세기의 가장 큰 흐름을 여성(Female), 감성(Feeling), 가상(Fiction)으로 봤는데 세계가 다극화면서 지식과 창의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며, 또한 여성의 섬세함이 디지털 시대의 특성과 잘 어우러지며 사회변혁의 주체로 등장할 것을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21세기 기업 경쟁력의 화두라 하며 감성사회의 도래를 예견했다.

 

BRAND Think 
*촉각

사실 제품에 촉각을 이용하는 대표적인 사례인 터치 기술은 등장한지 30년도 더 됐다. 다만 1990년 대 들어 PDA가 등장한 뒤 2004년경 자동차용 내비게이션, 애플의 아이폰 등장에 따라 그 사용범위가 폭발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예를 들어 터치 기술의 정점인 터치스크린이 적용되는 제품군이 늘면서 그 핵심부품인 터치패널 시장의 경우 2008년 88억 달러 규모에서 올해 134억 달러 규모까지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으며 3년 내에 200억 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촉각을 이용하는 기술은 많은 사람들이 제품을 더 직관적으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 ‘User-friendly’라는 가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원근법적인 사고
중세에서 빛은 신의 예지나 성스러움의 원천으로 매우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발명된 투시적 원근법은 빛에 대한 이러한 형이상학적 사고에서 탈피해 빛을 광학의 대상으로 객관화시키며 신의 시선이 아닌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인간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려 한 시도였다. 이런 선형적 조망에 따라 그려진 세상은 나를 중심에 두고 멀고 가까움에 따라 사물들이 재편되며 그것을 보는 사람의 시점이 매우 중요해진다. 본다는 행위는 주체의 형성과 연결되며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재편하는 권력을 가지게 됨을 뜻한다.

 

 

그런데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그저 인문학 책만을 읽으라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은 예술과 과학, 디자인과 테크놀로지 등
모든 학문들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죠. 

 

 

UnitasBRAND 그렇군요. 여러 가지 방면에서 애플은 트렌드를 만들고, 이 사회의 시대정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애플은 자신들의 이러한 성공을 테크놀로지와 인문학의 결합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죠. 오늘 인터뷰를 통해 스티브 잡스가 들뢰즈를 알았든 몰랐든, 혹은 칸트의 공통감을 알았든 몰랐든, 결과론적으로 놓고 보면 인문학적 사고를 했다는 것은 증명된 것 같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인문학적 소양과 제조를 하는 것은 동떨어져 보이죠. 사실, 인문학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접목시켜야 하는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인문학은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분야가 아닙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것이기에 이것은 필수라고 할 수있지요. 그런데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그저 인문학 책만을 읽으라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기업에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사고해본 적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첫 단추라고 한다면 인문학적 사고,
더 나아가 융합적 사고의 인식 전환부터 해야 할 거예요.
 
 

 

 

오늘날은 융합, 혹은 통합의 시대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Multi-discipline, 또는 Cross-discipline이라고 불리며 학과를 가로지르거나, 학과를 중복하여 연구하고 있어요. 과거에는 각각의 학문에 소위 칸막이를 쳐서 다른 영역의 학문은 전혀 몰랐죠. 그러나 지금은 *예술과 과학, 디자인과 테크놀로지 등 모든 학문들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죠. 저는 지금 인문학을 공부하는 거라면, 이런 관점으로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것이 1~2년 내에 이루어지는 수월한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식 전환이죠. 기업에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사고해본 적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첫 단추라고 한다면 인문학적 사고, 더 나아가 융합적 사고의 인식 전환부터 해야 할 거예요. 

 

*예술과 과학, 디자인과 테크놀로지 등 모든 학문들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죠
최근 20년간 경제 패러다임은 포스트 산업경제를 시작으로 정보, 디지털 경제를 넘어 창조 경제로 급변하고 있다. 창조 경제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지식, 기술, 학문 간의 융합이다. 하이브리드 자동차, 지식의 통섭, 과학과 예술의 융합, 크로스오버 음악 등 최근 자주 접할 수 있는 모든 용어 속에는 미래를 위한 융·복합의 창조적 지향점이 숨어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학제간의 융합도 더불어 활발해지고 있는데 과거 학제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다양한 분야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인지 심리학과 경제학의 융합인 행동 경제학이나 뇌과학과 경제학의 만남인 신경 경제학, 신경 마케팅 혹은 생물학과의 융합으로 탄생한 진화 경제학 등이 그 예다.

 

 

가장 오래된 브랜드들을 배출한 유럽의 경우
인문학적 세계관이 바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UnitasBRAND 우리나라의 경우 전쟁 이후 불가피하게 압축성장을 해야 해서 인문학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환경적인 요인도 있었던 것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식의 전환이 더 필요한 것일 테고요. 사실 브랜더들이 인문학에 더욱 관심을 갖는 이유는 글로벌화가 되면서 세계를 바라보니 역사가 오래된 브랜드들이 많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죠. 그 가운데에서 그들은 가장 오래된 브랜드들을 배출한 유럽의 경우 인문학적 세계관이 바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브랜더들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면요. 

 

 영혼,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우리는 사실 기술 발달로만 달려왔어요. 그래서 기술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나 기술은 이제 한계점에 부딪쳤어요. 다시 애플 얘기를 해보면, 애플에서는 그들만의 정신이 느껴지잖아요.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죠.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브랜더들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면
'영혼'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예컨대, 그들을 보면 ‘배려’라는 것이 보이죠.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들은 소비자들을 배려하고 있어요. 아주 작은 차이지만, 소비자들이 자사의 제품을 썼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아주 디테일한 배려들이 곳곳에 숨어 있잖아요. 디테일이란 기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가 있을 때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는 거죠. 이것처럼 완벽한 기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고귀한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브랜더들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 같아요.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혼을 넣죠. 그렇다면 제품도 그 안에 브랜더의 혼,
혹은 기업의 혼을 집어 넣어 살아 숨쉬는 생명체로 만들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겠죠. 
 
 

 

 

스티브 잡스의 경우 선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러한 정신이 애플의 곳곳에 녹아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일본의 화가 무라카미 다카시가 루이비통과 콜레보레이션을 했잖아요. 이것이 뜻하는 것은 이제는 상업적인 예술, 순수예술과 같은 경계는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래서 저는 모든 제품은 예술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혼을 넣죠. 그렇다면 제품도 그 안에 브랜더의 혼, 혹은 기업의 혼을 집어 넣어 살아 숨쉬는 생명체로 만들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겠죠. 브랜드가 그냥 제품이냐, 아니면 예술품이냐 하는 것은 그것에 정신이 들어가 있느냐 아니냐로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브랜더들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이제 분명해지지 않나요? 


박정자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조선일보, 경향신문 기자, 문공부 해외공보관 전문위원 등을 거쳐 상명대 불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후 퇴임했다. 사르트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30년 넘게 푸코의 이론을 연구하고 1979년 한국에 푸코를 번역한 첫 번째 책을 내며 한국 철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원에 출강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마그리트와 시뮬라크르》 《시선은 권력이다》 등이 있다. 인터뷰 이후로 '이것은 Apple이 아니다'저서를 출간했다.


출처 : 유니타스브랜드 Vol 22 브랜드인문학 유니타스브랜드 SEASON 2 Choice 
- П. Philosophy) 아름다움의 힘, 브랜드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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