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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브랜드 인문학', 존재와 관계의 중심?

브랜딩/브랜드 인문학, 인문학적브랜드

by Content director 2022. 5. 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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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terview with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신승환

 

 

“존재적 실존 양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hic et nunc)에만 있다. 반면 소유적 실존 양식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있다.

소유적 실존 양식의 인간은 그가 과거에 축적한 것

- 돈, 땅, 명성, 사회적 신분, 지식, 자식, 기억 등-에 묶여 있다.”

-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hic et nunc

몇 년 전만 해도 ‘상품’의 꿈은 ‘소비’되는 것이고, ‘브랜드’의 꿈은 ‘소유’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브랜드가 감히 존재 그 자체가 되고 싶어 한다. 브랜드는 인간 삶의 중심 그리고 관계의 중심이 되고자 열망한다. 

그것이 브랜드의 존재 이유와 가치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브랜드가 인간의 존재에 관한 질문을 다시 한다.
“브랜드는 소유의 대상인가? 존재의 표현인가?”
신승환 교수는 이 질문에 ‘지금 여기에 인문학’라는 관점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좋은 브랜드는 더불어 사는 데 호소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브랜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브랜드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브랜드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우리의 존재를 물어보아야 된다.
“지금 여기에 왜 우리 브랜드가 존재해야만 할까?”

 


브랜드가 소비자와 진짜로 공명하고 싶다면 소비자를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소비자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인문학을 
말해야 하는 이유

 

UnitasBRAND《지금, 여기의 인문학》이라는 교수님이 쓰신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이 제목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지,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브랜드 인문학’ 특집을 준비하면서 인문학이 주는 다양한 의미를 생각해 보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의 인문학’은 하나의 화두처럼 다가왔거든요. 저도 책을 여러 권 써 보았지만, ‘제목’을 정할 때 저자는 수많은 고심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 인터뷰는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의 인문학’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지부터 말이죠.

 

신승환(이하 '신')   지금 여기(hic et nunc)’라는 말은 중세 초기부터 사용하던 말입니다. 역사가 아주 깊은 말이지요. ‘지금’은 시간적인 의미이며 ‘여기’는 공간적인 의미인데, 결국 ‘지금 여기에’라는 말은 ‘현재’를 뜻하는 겁니다. 이 ‘현재’는 인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예요.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과 관계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인간의 삶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분석하는 학문이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말이에요.

 

 ‘지금 여기(hic et nunc)’라는 말은 ‘현재’를 뜻하는 겁니다.
이 ‘현재’는 인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예요.

 

 

우리는 이러한 삶에 관계된 것들을 생각할 때, 일련의 과정을 거칩니다. 먼저 과거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지요. 과거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흔적과 경험들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며 그것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과거를 통해서는 더 나은 삶을 위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알게 되죠. 그러면 이제 이것을 거울 삼아 우리는 미래를 계획해 봅니다. 나는 무엇을 더 알아야 할까, 나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까 등을 생각해 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한 후,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겠다’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순간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인간은 늘 이 현재 속에서 매 순간 연속적인 사건들을 만납니다. 
인문학은 바로 이 사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정의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인 거지요. 

 

 

이 결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바로, ‘현재’입니다. 사실 과거나 미래는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가 그 순간을 만난 적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주하는 순간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인간은 늘 이 현재 속에서 매 순간 연속적인 사건들을 만납니다. 인문학은 바로 이 사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정의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인 거지요. 이 ‘해석’을 통해 우리가 ‘현재’에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가 선택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인문학에서 중요한 화두입니다. 

 

 

이 궁극은 바로, ‘자기 이해’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나를 이해하는 것’이지요. 

 

 

UnitasBRAND 결국 우리의 삶은 현재의 연속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인문학이란 어떤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교수님도 알다시피 ‘인문학’이라는 것이 소위, ‘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가 제대로 인문학을 알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거든요.

 

신  그렇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꾸 인문학을 배우려고 하지요. 그런데, 인문학이란 배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내 자신의 *주체가 무언가를 해석하는 것으로 ‘의미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무엇을 이해하는가가 다음 질문일 텐데요. 인문학은 인간의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분석하는 학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궁극은 바로, ‘자기 이해’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나를 이해하는 것’이지요. 

 

 

인문학이란 결국, 나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현재 존재하는 나에 대해 이해, 즉 자기 이해를 해보려는 시도인 겁니다. 

 

인문학이란 결국, 나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인간 자체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이해하는 존재지요. 예를 들어, 오늘만 봐도 그렇습니다. 브랜드와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께서 전혀 다른 분야에 있는 저에게 연락을 했다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연락을 한 것이잖아요. 이처럼 인간은 무엇을 하든, 무엇을 보든 그 과정에서 쉴 새 없이 이해를 도모합니다. 인문학이란 바로 이 이해를 추구하는 것으로, 결국에는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해 보면서 지금 현재 존재하는 나에 대해 이해, 즉 자기 이해를 해보려는 시도인 겁니다. 


‘자기 이해’에서 ‘자기’를 재미로 붙인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이해가 결국 ‘자기’ 이해거든요. 그런데 이 이해는, 존재 전체가 참여해야만 비로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일 수도 있는데요. 존재론적 참여란 존재 자체가 자기 이해를 전적으로 도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성찰한다’라는 단어를 쓰잖아요. 이 ‘성찰한다’는 말을 쓸 때 그 의미는 ‘반성한다’라는 뜻이죠. 하지만 인문학에서 성찰한다고 했을 때는 ‘지금 현재 존재하는 나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라는 관점으로 인문학을 바라보았을 때는 넓은 의미에서 사실, 모든 것이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경제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경제 인문학, 디자인을 이해하려고 하면 디자인 인문학이겠지요. 지금 여기에서 브랜드를 이해하려는 편집장님도 인문학 자라는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이해가 결국 ‘자기’ 이해거든요. 
그런데 이 이해는, 존재 전체가 참여해야만 비로소 이뤄질 수 있습니다. 

 

 

UnitasBRAND 결국 저도 여기에 인문학자로 앉아 있는 거군요. 이제까지 많은 인문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알게 된 것 중의 하나가 대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경우, 유니타스브랜드와 인터뷰를 하면서 저희가 던진 질문을 듣고는 공부할 것이 더 생겼다면서 즐거워하시더군요. 연구를 해보고 말씀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결국 한 달 만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셨지요. 이게 질문의 힘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 말입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궁금해지더군요. 인문학적인 질문이라는 것이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교수님이 생각하시기에 가장 인문학적인 질문, 그러니깐 인문학적인 소양을 가진 사람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왜’라는 질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질문이라는 것은 사실, 답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질문이 답을 결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 “어제 뭐 했어?”라는 질문에는 ‘어제 한 일’이라는 답이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받고 엉뚱하게 누구랑 있었다고 대답하면 안 되는 거지요. 이처럼 질문 속에는 답이 결정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하는 사람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다만 그게 주제적 혹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에서 “왜 살지?”라고 물을 때는 이미 질문 속에 ‘왜’라는 답이 결정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무엇을 한다’라는 답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왜’는 ‘이해’가 동반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질문이자 답이죠. 그래서 인문학에서 ‘왜’라고 묻는 질문에는 이미 내 존재에 대한 이해가 들어 있어요. 

 

인문학에서 ‘왜’라고 묻는 질문에는 이미 내 존재에 대한 이해가 들어 있어요. 

 


그렇다면 ‘답’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답이란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질문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죠. 그게 바로 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왜’라는 질문이 가장 인문학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인문학에서는 ‘정답(正答)’이 없습니다. ‘해답(解答)’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란 해석학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답들 중에 내가 어떤 이해를 가지고 어떤 해답을 찾을 것인가가 인문학이라는 겁니다.

 

*주체
‘주체’는 서양 철학의 핵심 개념이자 근대철학의 시작을 알린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단체나 물건의 주가 되는 부분’으로 어떤 작용이나 행동의 주主가 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주체는 인식론 영역에서 인식 주체를 의미하며, 앎의 내용을 갖게 되는 사람을 지칭한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근대 서양철학은 이처럼 인식하는 주체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인간이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 근대 철학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로 근대 철학을 주체 중심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문학에서는 ‘정답(正答)’이 없습니다. ‘해답(解答)’만이 있을 뿐입니다. 

 

 

UnitasBRAND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아마도 이 질문에도 답이 결정되어 있겠지요. 사실, ‘인문학은 죽었다’는 말을 할 정도로 한때 인문학은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이 인문학을 배우기 위해 속칭 ‘돈’ 되어야만 움직인다는 경영학까지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인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겠지요. 그렇다면 인문학을 공부한 학자로서 죽어간다고까지 하던 이 인문학에서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신  뭘 얻었다기보다는 저에게는 이 학문 자체가 제 자신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조들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부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를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인문학이란 자기 이해의 학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학문을 통해 저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이해란 존재 전체가 참여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내 자신 전체가 참여해서 들어갈 때 비로소 지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브랜드도 이렇게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학문은 또는 이해는 자기 존재 참여가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자기 이해란 존재 전체가 참여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내 자신 전체가 참여해서 들어갈 때
비로소 지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브랜드도 이렇게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기 이해를 하게 되면 다른 사람도 이해하게 된다는 겁니다. 나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가 되면, 그 다음으로 다른 사람이 이해되는 거지요. 《지금, 여기의 인문학》이라는 책도 저의 이해가 끝났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사람과 이 얘기를 나눠볼 수 있겠다, 해서 쓸 수 있었던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이란 결국, 타자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대 사회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들이 진보, 이성, 합리성과 같은 것들이었죠. 
그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을 주체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독립적인 주체라고 생각한 거죠. 

 

인문학이란 결국, 타자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 이후, 소위 *탈근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되면서 그 답이 변화되기 시작됩니다. 인간은 객체나 주체로 나눠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로 인식의 변화를 맞게 된 거지요. 다시 말해 인간이란 객체 혹은 주체로 구분되는 것이 아닌, 나와 너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단적인 예로, 남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태도가 바뀌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지 않나요? 혹은 나의 바뀐 태도가 상대방을 변화시킨 경험은요? 

 

근대에는 인간을 주체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타자와 상호작용 하는 것을 알지 못했어요.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거지요. 지금 이곳에서, 인문학에서 제가 얻은 것은 바로 나의 이해를 통해 남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운 거라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 이것이 인문학의 목적이자 결과며, 결국엔 남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BRAND Think 
*
현재는 이 인문학을 배우기 위해 속칭 ‘돈’ 되어야만 움직인다는 경영학 

세상은 변했다. 경영도 변했다. 아니, 변했다라기 보다는 재조명 되고 있다. 과거 기업은 영리 추구가 제 1의 목적이라 외쳤던 서구의 학자들마저 이제는 기업의 영혼(필립 코틀러)을 언급하기도 하고 명분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역설(톰 피터스, 게리 해멀)하는 등 기업의 존재 이유는 가치 실현이며 수익은 이것이 제대로 완성되었을 때 얻어지는 결과물로 설명하는 추세다. 

 

*탈근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탈근대에서 말하는 ‘탈’ 은 벗어나다 혹은 후기라는 뜻으로 근대 이후를 의미한다. 탈근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근대라는 개념을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근대 철학이란 하나의 보편적인 기준을 상정하고 그 기준과 다른 것을 모두 배척시켰다. 이러한 근대의 획일적인 사고 틀 속에서는 인간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과학을 신봉하는 개인으로만 규정함으로써 그 밖의 인간에 대한 시각은 모두 배제된다. 근대의 이러한 시각에 대한 비판과 벗어남의 일환으로 탈근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인간에 대한 시각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게 된다. 이로써 진정한 독립적 존재로서의 자아가 정립되는 조건으로 타자의 존재를 상대적 개념의 또 다른 자아라고 보게 되었다.

 

 

“답이란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질문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죠. 
그게 바로 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왜’라는 질문이 가장 인문학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브랜드에서
인문학을 
말할 수 없는 이유

 

UnitasBRAND 경영에서 인문학을 기웃거리는 이유 중 하나가 인문학을 경영의 대체 학문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문학을 단지 소비 심리학, 혹은 고전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이지요. 아니면 기업 교양이나 기업의 지적 활동으로 여긴다든가요. 과연, 지금 여기의 수준에서 ‘지금 여기의 인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인문학은 다른 말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말하는 철학은 학문적인 의미의 철학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철학이란, 자연이든 인간이든, 혹은 세계든 한 나라든 그것의 ‘근원적인 의미’를 밝혀내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이 무언가의 ‘이해’라고 했을 때, 이 이해는 결국, 근원적인 의미를 밝혀 내는 것을 얘기하는 거지요. 

 

 

철학이란, 자연이든 인간이든, 혹은 세계든 한 나라든 
그것의 ‘근원적인 의미’를 밝혀내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얼마 전, 한 연구소에서 낸 ‘인문학이 경영을 바꾼다’는 보고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자로서 마음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현재 경영에서 말하는 인문학은 경영에 도움을 주기 위해 인문학을 ‘이용’하는 것이더군요. 인문학은 자본주의의 잉여분이 아닙니다. 자본주의의 틈새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인문학이란 앞서 말했듯이 근원적인 의미를 밝혀 내는 철학입니다. 이러한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문학에 접근한다면 그것이 과연 어떤 효과를 낼까요? 제가 볼 때는 경영에서 얻으려고 하는 인문학적 유익은 절대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실패한다는 겁니다. 그저 경영에 인문학적 요소를 가미하겠다는, 혹은 인간적인 의미를 덧씌우겠다는, 시쳇말로 조미료 치듯 인문학을 사용하는 것은 인문학을 정반대로 이해하는 것이니까요. 인문학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UnitasBRAND 교수님 말씀처럼 사람들은 인문학을 소프트하게, 그야말로 말랑말랑한 것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인문학은 가치관과 세계관을 건드리는 학문이잖습니까? 그래서 기술이 발달해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지만, 인문학을 논하면 혁명이 일어나지요. 우리는 인문학을 너무 얕보는 것 같습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1990년대 초반 제가 독일에서 유학 당시, KBS에서 독일의 한 기업을 취재하러 온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랩을 만들던 회사였는데 놀라운 것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랩을 생산하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역사가 어마어마하죠. 이 회사는 일본의 토요타가 등장하기 전까지 시장의 80%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토요타가 새로운 기술로 시장에 등장하자 60% 대로 떨어졌죠. 이 때가 1960년대 초반입니다. 이 회사의 오너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처방한 것은 CEO를 법철학 교수로 바꾸는 것이었어요. 새로 부임한 CEO는 먼저 출퇴근을 자율제로 정합니다. 그래서 직원들은 10~12시까지만 자리에 앉아 있으면 되었고, 그 외에는 자신의 재량대로 시간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독일은 이미 경영에 인문학을 접붙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인문학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업철학으로 삼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 해외 출장을 가고 싶다면 경리실에 가서 간단한 사인만 하고는 돈을 가져오면 됐죠. 그리고는 출장을 다녀온 후에는 결과에 대해서만 보고하면 그뿐이었어요. 이러한 경영을 한 결과, 이 회사는 토요타에게 빼앗긴 시장을 도로 찾아왔습니다. 이 회사는 시스템을 바꾼 게 아니에요. 마인드를 바꾼 겁니다. 이때가 1960년대였잖아요. 이때부터 독일은 이미 경영에 인문학을 접붙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인문학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업철학으로 삼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이때의 독일보다 더 좋을까요? 물론, 외형적으로는 훨씬 더 좋겠지요. 그러나 오너가 과연, 이런 결단을 할 수 있는 마인드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섣불리 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UnitasBRAND 그렇다면 질문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만약 경영자들이 인문학이 세상의 전복(顚覆)을 꿈꾸는 묵직한 것이라는 진의眞意를 안다면 과연 지금처럼 인문학을 도입하려고 할까요? 

 

그렇다면 그 고민의 시작을 여기에서부터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세계적인 분위기가 어떤 것이냐 하면, ‘자본주의 이후’를 고민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본주의 이후’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이후의 다른 어떤 체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조금 고쳐서 자본주의 체제를 이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유럽의 나라들에서는 실제적으로 자본주의 다음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활발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문학을 데커레이션으로 사용하려고 한다면, 결국 사람들에게 들키고 맙니다.
사람들은 명시적으로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비명시적으로 감지를 합니다.

 

 

자본주의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가치판단과 진리의 기준, 혹은 선악 판단의 기준을 자본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거지요. 자본주의 이후라는 것은 바로, 가치판단의 준거를 자본에 두지 말자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에서 경영학이 인문학을 가져와서 ‘포장’을 하려고 한다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거겠지요. 인문학을 데커레이션으로 사용하려고 한다면, 결국 사람들에게 들키고 맙니다. 사람들은 명시적으로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비명시적으로 감지를 합니다. 느낌으로 단박에 안다는 거예요. 기업에서 이 인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계속 인문학적 포장을 고집한다면, 앞으로 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성공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BRAND 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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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가치관과 세계관을 건드리는 학문 

한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건드리는 현상은 이제 인문학뿐만 아니라 브랜드학에서도 엿보인다.
기업이 만들어낸 제품(Commodity)이 아이덴티티(Identity)를 갖게 되어 명실상부한 브랜드로 자리잡으면 이는 더 이상 한 기업의 제품과 아이덴티티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의 이데올로기(Ideology)가 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 푸고 있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이념’, 이것이 이데올로기다. 그리고 이는 이를 지지하는 군중을 만들어 새로운 변혁을 꾀한다. 혁신과 창의적 사고를 꾀하는 애플의 이데올로기가, 자유를 갈망하는 할레데이비슨의 이데올로기가 나름의 문화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브랜더가 (가치관과 세계관을 건드리는 학문인) 인문학을 알아야 하는 당위는 이로 족하다.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업은 ‘스피릿(spirit)’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브랜드가
여기의 인문학을
만나야 하는 이유

 

UnitasBRAND  이번 질문은 브랜드에 있어 매우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예요.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교수님은 신학과 철학을 모두 공부하셨기에,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아커라는 브랜드 구루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는 정서적 이익, 기능적 이익, 자아표현적 이익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코카콜라가 최고의 브랜드가 된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을 했죠.

“코카콜라를 정서적 이익, 기능적 이익, 자아표현적 이익으로 분해시킨 후 다시 모두 모으면 코카콜라와 같은 브랜드를 만들 수 있습니까?”

그의 답변은 이것이었습니다.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업은 ‘스피릿(spirit)’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 스피릿, 그러니까 영성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자신이 죽을 때쯤 나오는 책을 보라고 하더군요. 현재 기업이나 브랜드에서 신학에서나 얘기할 법한 *영성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이 영성이라는 것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십니까? 

 

신 우리가 흔히 *이성과 감성을 구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고 감성은 이성을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근대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아예 감성에 관한 학문은 열등한 학문으로 치부하여 예술, 신화 등과 같은 학문을 평가절하하기도 했지요. 이렇듯 근대사회의 특징은 감성에 관한 모든 것을 배제시켜 버렸어요. 하지만 오늘날 이성의 작용이라는 것이 감성의 뒷받침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에게는 이성과 감성뿐만 아니라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이 지평을 넘어선 것, 그게 바로 초월입니다. 여기에서 영성이란 것이 나옵니다. 
초월해 가는 과정은 이성도, 감성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수성입니다. 

 

 

바로 인간은 ‘초월’을 지향한다는 거예요. 초월이란 흔히 말하는 천당이나 지옥과 같은 초월적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월이란, 인간이 현실적인 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구를 말하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늘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그 너머의 것,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예를 들어, 영혼이 있을까, 없을까 하고 얘기를 한다면, 이 얘기하는 것 자체가 바로 ‘*초월’이라는 거예요. 이처럼 내가 서 있는 이 지평을 넘어선 것, 그게 바로 초월입니다. 여기에서 영성이란 것이 나옵니다. 초월해 가는 과정은 이성도, 감성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수성입니다. 감수성이란, 예를 들어 산림욕을 하기 위해 숲 속에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몸이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듯한 그 느낌, 그것이 바로 감수성입니다. 

 

브랜드에서 영성을 얘기할 때는 영성이라는 것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해요.
그렇지 않다면 이것 역시 브랜드를 데커레이션 하는 것에 불과해요.

 

영성이란, 바로 초월에 대한 감수성입니다. 사실, 영성이란 가톨릭에서 나온 말이죠. 그래서 종교에서 영성은 그들이 믿는 신에 의해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학문이나 문화에서 영성은 초월에 대한 느낌, 바로 감수성을 얘기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월에 대한 욕구는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욕구를 기업에서 자칫 잘못 사용할 경우 어떻게 될까요? 이것에 대해 기업은 진지한 자세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욕구를 기업의 포장용으로 사용할 경우, 인간이 가지고 있던 감수성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랜드에서 영성을 얘기할 때는 영성이라는 것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해요. 그렇지 않다면 이것 역시 브랜드를 데커레이션 하는 것에 불과해요. ‘영성’이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귀한 내적 의미마저 천박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죠. 

 

BRAND Think 
*
데이비드 아커라는 브랜드 구루와 인터뷰

데이비드 아커(David A. Aaker)는 케빈 켈러, 장 노엘 캐퍼러와 함께 브랜드 분야의 3대 석학으로 알려진 브랜드 마케팅 분야의 개척자로 현재 UC버클리 하스 경영대학원 명예교수다. ‘디자인 경영’ 특집에서 인터뷰를 통해 그는 브랜드 학습법, 디자인(브랜드) 경영, 국가브랜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소견을 밝혔다(유니타스브랜드 Vol.10 p248 참조).

 

BRAND Think 
*영성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물질적 목적을 넘어서는 자기실현’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 조직인지, 그리고 왜 그 비즈니스에 종사하는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뿐만 아니리 스스로 ‘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업의 ‘미션’과 ‘비전’, ‘가치’에 담아야 한다. 소비자들이 이러한 기업들이 자신의 가치 실현에 기여했다는 것을 인정해줄 때 수익은 절로 따라올 것이다. 이것이 기업의 관점에서 보는 영성 마케팅, 즉 영적 마케팅이다(《마켓 3.0(필립 코틀러, 타임비즈)》 중에서).”

 

*이성과 감성
이성은 사물을 옳게 판단하고 진위·선악 등을 식별하는 능력으로 감성과 대립하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감성은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각의 작용을 말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계의 질서와 인간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원리의 근본법칙(logos)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근대에 들어서 유럽사회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경험과 이성, 그리고 지식과 사상만을 참다운 진리로 간주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론 또는 합리론을 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의 인식은 직관적으로 인식되는 감성을 통해 사유되어 종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초월
초월은 한계나 표준, 어떤 영역을 넘어서는 것을 뜻한다. 또는 넘어선 맨 앞의 것을 의미하는데 넘어설 수 없는 영역의 차이에 따라 초월의 내용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데아’는 현상계를 초월한 존재로서 ‘초월자’를 뜻하며, 중세 스콜라철학에서는 ‘일一’이라든가, ‘진眞’, ‘선善’을 ‘초월개념’으로 보고있다. 반면 인간의 의식 밖에 있는 것을 초월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영성은 궁극적 또는 비물질적 실재, 자신이 의거하여 살아야 할 준칙으로서의 가장 깊은 가치 등을 의미하는데 영적 수행들이 바르게 수행되었을 때 더 커다란 실재와 연결 또는 합일되는 경험, 즉 초월을 통해 더 커다란 자아에 이른다고 여겼다. 

 

 

 

UnitasBRAND  제 주변에 무신론자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자연을 보면 창조주가 있는 것 같아” 하더군요. 이 표현이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무신론자와 창조주는 모순 관계잖아요. 그런데 교수님 말씀처럼 이것이 바로 초월적인 감수성이 발현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인문학을 하는 분들이 잘 만나 주지 않는 것이었어요.

 

지금까지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경영자들이 인문학을 ‘이용’하려 한다는 점 때문이죠. 어떤 분의 경우, 경영자라는 단어 대신에 ‘장사치’라고 부르며 브랜드를 천민 자본주의의 결정체라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허영과 욕망의 상징이라고요. 교수님은 브랜드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고 계신지요? 

 

신 저는 브랜드 자체에 대한 반감은 없습니다. 또한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섣불리 어떤 얘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인문학자로서 좋은 브랜드란 어떤 것일까, 라는 화두는 던져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이것은 다른 말로, 소위 끝까지 살아남는 브랜드는 어떤 것일까, 라는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브랜드는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해 공감하고, 공명할 수 있는 브랜드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공감하고 공명하는 대상이 사람의 어떤 기호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여야 한다는 거지요. 성경에서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창세기의 경우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성경 중의 하나예요. 그 중 한 구절에서 하나님이 무언가를 하나씩 창조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어요. 상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의 핵심은 바로, 상대방의 존재를 보고 내가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보고 즐거워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공명입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브랜드는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해 공감하고, 
공명할 수 있는 브랜드라고 생각합니다. 


공명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공생하는 삶’ 그러니까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합니다. 사실 이 가치는 발견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한 번 언급했지만, 근대 사회만 해도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이 존재했어요. 여기에는 더불어 산다는 개념이 없어요. 그런데 탈근대로 오면서 주체와 객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겨난 겁니다. ‘이름’을 예로 들어 보지요. 고대에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소유’를 의미했어요. 그래서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을 소유하고 장악하는 주인이 된다는 것을 뜻했지요. 이것이 근대까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사람을 바라보던 시각이 관계로 재편성되면서 이름이라는 것의 의미도 바뀌어졌어요. 

 

이처럼 존재끼리 공명하는 것, 
그리고 더불어 사는 것은 이제 시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되었습니다. 

 

내가 너를 ‘무엇’이라고 부르겠다, 하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를 설정하겠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연인 사이에 ‘자기’라고 부른다는 것은 ‘자기’라는 이름으로 너를 소유하겠다는 것이 아닌, 너와 나를 ‘자기’라는 관계로 설정하겠다는 말인 거죠. 이처럼 존재끼리 공명하는 것, 그리고 더불어 사는 것은 이제 시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업은 이 가치를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데 호소하는 브랜드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더불어 살아간다는 가치를 무시해 버리고 내가 더 많은 것을 얻겠다, 그러니까 소유하겠다 한다면 그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결국 살아남기 힘들겠지요. 

 

BRAND Think 
*허영과 욕망의 상징

“브랜드에 있어서 가장 중독성이 강한 요소는 ‘물질주의’ 그 자체다. 브랜드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인 허영을 이용한다.”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의 저자 닐 부어맨은 과거 ‘브랜드 중독자’였던 삶에서 벗어나 ‘브랜드 거부자’로 살아가며 브랜드에 대해 위와 같이 말한다. 많은 기업들이 가격과 인지도, 충성도만으로 이루어진 겉멋든 브랜드를 만들려 했고 따라서 브랜드에 대한 건전한 기준이 세워지지 않아 사람들에게 생긴 브랜드에 대한 편견이다. 이들의 의견에도 귀 기울여 진정한 의미의 브랜드의 정의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유니타스브랜드 Vol.12 p76).

 

스타벅스의 경우 커피를 주문하면 비퍼를 주지 않아요.
그 이유는 커피를 줄 때 고객의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짓는 것까지
원가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이처럼 현재 브랜드는 과거의 소유 개념에서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UnitasBRAND 독특한 제품을 만들기로 유명한 더바디샵 브랜드는 어떻게 차별화된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생각하는 게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고요. 그런가 하면, 스타벅스의 비전 슬로건을 보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영감을 불어넣는 기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타벅스의 경우 커피를 주문하면 비퍼를 주지 않아요. 그 이유는 커피를 줄 때 고객의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짓는 것까지 원가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이처럼 현재 브랜드는 과거의 소유 개념에서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고 제품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서비스까지 디테일하게 신경 쓰고 있지요.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런 것이 공명하는 브랜드의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진짜 더불어 사는 가치를 알고 공명하는 브랜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 만일 기업이 자기만의 가치를 가지고 무한한 성장만 하기 원한다면 언젠가는 망하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최고 속도를 달리며 정점을 찍으면 그것이 끝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공명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완전히 달라지겠지요. 자신이 공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상대방이 바뀌었는지 바뀌지 않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진짜 공명하면, 상대방이 바뀝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자신이 바뀌어 있는 거죠. 상대방에 대한 존재에 진정으로 공명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바뀌고, 결국 이것은 상대방을 바뀌게 하지요. 왜냐면 공명은 상호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공명은 말이 쉽지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거겠지요. 사랑해 보셨지요? 사랑하면 달라집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사랑하게 되면 그 이상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공명도 이와 같은 겁니다. 

 

 

자신이 공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상대방이 바뀌었는지 바뀌지 않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진짜 공명하면, 상대방이 바뀝니다. 

 


ⓒ thebodyshop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만약, 어떤 존재와 공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을 생각한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먼저 공명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공명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이 더욱 중요해진 겁니다. 내가 먼저 공명하기 위해서는 ‘자기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해란 끊임없이 자기 회귀를 통해 셀프 니스(selfness), 그러니까 자기다움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잖아요. 그래서 자기 이해의 끝은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지요. 

 

개인의 존재에 대한 전적인 이해가 없으면 다른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칼 폴라니는 “모든 이해 행위는 그것을 아는 자의 개인적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했죠.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이란 머리로 하는 학문이 아니라 내 몸이, 내 존재 자체가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학문이라는 겁니다. 
기업이 영적인 가치라든가 인간적인 가치를 내세울 때 사람들이 웃는 이유는 기업이 더 많이 팔기 위해 말로만 저런 가치를 내세우는구나, 라며 믿지 못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브랜드가 소비자와 진짜로 공명하고 싶다면 소비자를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소비자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BRAND Think 
*스타벅스

스타벅스는 커피 전문 기업이지만 커피 사업coffee busi-ness을 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 사업people business을 하는 곳이다. 스타벅스에 비퍼가 없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답지 않기 때문이다.” 스타벅스는 물론이고 괄목할 만한 혁신과 성장을 이룬 브랜드들은 저마다 고객에게 브랜드를 ‘소유’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자기답게 ‘존재’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유니타스브랜드 Vol.14 p154 참조).  

 

 

UnitasBRAND  공명하는 브랜드라고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가 ‘아름답다’였습니다. 아름답다는 미적으로 예쁘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내뿜는 *선한 영향력으로 인해 충만한 느낌을 얻을 때 아름답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사실 브랜드는 현재 이 두 가지를 모두 취하려고 합니다. 미적으로도 충분히 예쁘지만, 브랜딩을 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움도 추구하려고 하죠. 아름다움이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신 미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이 있잖아요. 이것은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철학적인 답을 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근대에서 미학을 말할 때는 두 가지의 개념을 충족시키면 아름답다고 했어요.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선미(眞善美)입니다. 고대에서는 진선미 중에 선(善)을 중심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했어요. 선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하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선이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달성하는 것을 선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구두장이가 구두를 잘 만드는 것, 편집장님처럼 책을 만드시는 분이라면 책을 잘 만드는 것이 선한 것이죠. 이렇게 선했을 때는 곧 진리를 말할 수가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선이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달성하는 것을 선이라고 부릅니다. 

 


왜냐면 이 선은 결국 ‘옳은’ 것이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선하고 옳다면 미(美),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되는 겁니다. 두 번째로 아름답다는 감성적인 느낌으로부터 주어지는 ‘정합성’을 아름답다고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비율적으로 완벽한 조화로움을 느낄 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그것 말이에요. 이러한 고전적인 아름다움은 탈근대로 오면서 조금씩 달라지는데, 저에게 만약 아름다움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제 대답은 다시 ‘공명’으로 귀결됩니다. 여기서는 감정의 공명이겠죠. 예를 들어, 2000년 1월 1일 정동진으로 일출을 보러 갔습니다. 사실 어제 떠오르는 해와 오늘 떠오르는 해는 똑같은 해이죠.

그런데 왜 유독 1월 1일에 그 해를 보러 갈까요? 그것은 새해의 첫날 아침에 떠오르는 그 찬란한 해를 보며 내 자신이 감격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내가 그 해를 보았을 때, 내 존재로부터 오는 공명을 받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의 아름다움입니다. 

 

‘내 자신의 존재에 공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입니다. 

 

 

‘내 자신의 존재에 공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최고의 아름다움은 바로, 신으로부터의 공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특정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론적인 의미에서의 신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초월적인 욕구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초월의 끝은 신이 되겠지요. 왜냐면 모든 존재의 끝은 신일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신으로부터 공명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공명이며, 그렇기에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좀 전에 친구 분이 “자연을 보면 창조주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하셨지요? 이런 맥락에서 친구 분의 말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자연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가 공명을 받는 순간, 최고의 아름다움을 경험한 거지요. 

 

BRAND Think 
*선한 영향력

의도했건 혹은 그렇지 않았건 간에 TOMS라는 신발 브랜드에서 한 켤레의 신발을 산 당신은 제3세계의 한 아이에게 신발을 신겨주었고, 파타고니아의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등산 장비를 구매한 당신은 자연 보호에 일조했으며, 오르그닷이란 업사이클링 브랜드에서 가방을 구매한 당신은 재활용을 간접적으로 실천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브랜드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그 자체로 아릅답지 않은가.

 

*진선미(眞善美)
사전적인 진선미의 뜻은 ‘참과 선과 미’ 즉 이상에 합치된 상태를 이르는 단어로 철학적인 개념의 ‘진선미’는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칸트에 와서 정리된다. 플라톤은 ‘아름다움(美)의 가치는 사물에 있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는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진이나 선과 구별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여 아름다운 대상이 모두 이상으로 삼는 표본으로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칸트는 동일한 대상이라도 최소한 세 가지 종류의 관심으로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며 진선미 개념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 또는 사물을 볼 때 ‘이론적’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은 진리(眞, 진)의 영역이고, ‘실천적’ 관심, 즉 ‘윤리적’ 관심으로 바라보는 것은 윤리(善, 선)의 영역이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움(美, 미)의 영역은 무관심에서 느껴지는 의도치 않은 미적 영역으로 설명하며 우리가 가진 관심이 어느 영역이냐에 따라서 진선미의 세계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왜 이렇게 있는가, 이런 모든 것이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UnitasBRAND 마지막으로 교수님께 질문하고 싶군요. ‘지금 여기의 인문학’을 하는 철학자로서 저희가 못 보는 어떤 세상을 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 존재 아닐까요? 가장 본질적인 것이 바로 내 존재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왜 이렇게 있는가, 이런 모든 것이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나 매일 이 같은 질문을 하고 사는 사람은 없지요 어떻게 매일 이런 질문들을 하고 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주제를 명시화시키고 주제화시켜서 드러낼 뿐이죠.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앉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미 여기 계신 분들도 저와 같은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이며, 현재 저희는 공명하고 있다는 거죠. 이것은 다른 말로, 제가 주체화시켜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에 대해 편집장님도 이미, 존재론적 참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신승환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독일 뮌헨 대학과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탈근대성 문제와 생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관련해 형이상학과 해석학에 대해 철학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인간으로서의 의미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우리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그는 《지금, 여기의 인문학》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생명과학과 생명윤리-철학적 성찰》 등의 저서를 썼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 유니타스브랜드 Vol 22 브랜드인문학 유니타스브랜드 SEASON 2 Choice 
- П. Philosophy) 지금 여기에 ‘브랜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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