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만화)요약
운명의 실
한승희(47세)는 일곱 살에 고아가 되었다.
한승희의 아버지 한상욱은 6.25 전쟁 당시 어머니와 함께 함경도에서 남쪽으로 피난 왔다. 그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되었고, 후에 월남전에 참전했다. 그곳에서 한상욱 중위는 한국계 미국 군인인 '엘리스 유' 간호장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노이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 임신한 엘리스 유는 일본 오키나와 기지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출산을 앞둔 엘리스는 한상욱과 함께 서울로 들어와 한승희를 낳았고, 한상욱의 어머니 손에 아이를 맡겼다. 하지만 하노이에 주둔하던 미국 보병 7017 의무대가 공격을 받아 긴급 인력 보충을 위해 자대 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엘리스 유는 백일도 되지 않은 한승희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부대로 복귀하던 중 베트공들의 급습을 받아 정글에서 실종되었다. 한상욱 중위는 아내를 찾기 위해 미군 수색대에 자원했으나, 작전 중 저격병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그렇게 한승희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러나 지병을 앓던 할머니마저 한승희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한승희는 방에서 사흘을 홀로 지내다 구청 직원에게 발견되어 한마음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병든 할머니를 돌보며 살았던 한승희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어른보다 깊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타인에 대한 이해심은 또래와 달리 남달랐다. 초등학생 시절, 그녀는 고아원에서 버려지고 찢어진 옷들을 모아 새 옷을 만들었다. 한마음 고아원의 구미란 원장은 이런 한승희에게 고급 교육을 받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향 친구이자 한마음 고아원의 후원자인 박부길 회장에게 패션에 관심이 많은 한승희를 소개했다. 모라비 그룹의 회장 박부길은 한승희를 미국에 있는 친척에게 보내 공부를 시키기로 했다.
한승희를 양녀로 삼은 박부길 회장은 이듬해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인 지경원 실장과 재혼했다. 처음에는 지경원도 한승희를 친딸처럼 잘 대해주었다. 시간이 흘러 한승희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지경원의 아들 구성호가 한승희에게 마음을 두는 것을 알게 된 지경원은 한승희를 미국의 박부길 회장 고모부 집으로 보내기로 했다.
한승희는 그곳에서 모라비 그룹의 해외 트렌드 통신원으로 일하며 공부를 이어갔다. 미국 패션 전문 대학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여러 교수진들의 조교로 발탁되었다.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는 듯했을 때, 박부길 회장이 지병으로 사망했다. 지경원 실장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한승희는 더 이상 모라비 그룹의 통신원으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일하며 힘겹게 학업을 이어가야 했다.
뉴욕 거리에서 한승희는 한마음 고아원 출신으로 미국에 입양된 윤민수를 만났다. 윤민수는 구미란 원장을 도왔던 미혼모 이영숙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주한미군 고아원 봉사활동에서 만난 제임스 소령에게 입양을 보냈다. 제임스 소령은 윤민수를 웨스트포인트에 입학시켰다. 한승희와 윤민수는 뉴욕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석 달 만에 결혼했다. 한승희가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윤민수와의 결혼 생활 1년이었다. 하지만 결혼 1주년을 맞이하기도 전에 윤민수는 중동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비행기로 이동 중 미사일 폭격으로 전사했다. 한승희는 군인이었던 아버지에 이어 남편마저 그렇게 잃었다. 그러나 그녀는 윤민수의 아들 윤시온을 임신하고 있었다.
한승희는 윤시온을 키우며 학업을 마쳤다. 그녀의 패션 감각은 탁월함을 넘어 비범했다. 마침내 최연소 교수가 되었고, 윤시온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아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다시 그녀의 삶에 시련이 찾아왔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시절 단짝 친구였던 김유경의 등장이었다. 김유경은 부유한 집안의 힘을 이용해 한승희와 늘 같은 반이 되게 했었다. 지경원 실장은 한승희의 친구인 김유경이 TH 백화점 사장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아들 구성호와 좋은 관계를 맺게 하고자 했다. 구성호는 한승희를 좋아했고, 김유경은 구성호를 좋아하는 삼각관계가 형성되었다. 결국 한승희는 지경원 실장의 암묵적인 지시로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젊은 날의 그들 이야기는 잠시 멈추었다.
김유경이 한승희가 교수로 있는 대학으로 오면서 다시 한번 갈등이 시작되었다. 한승희는 김유경의 논문 표절과 아버지 회사 자료 불법 사용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변호하지 않아 김유경과 갈등관계가 되었다. 게다가 모라비 그룹과 TH백화점 간의 전략적 결혼으로 맺어진 구성호와 김유경의 관계도 문제였다. 구성호는 여전히 한승희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한승희는 이 복잡한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영숙 원장은 윤민수의 친어머니이자 한승희의 시어머니, 그리고 한마음 고아원의 원장이었다. 한승희는 작은 옷가게를 운영하며 한마음 고아원을 돕고, 윤시온과 함께 세 번째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16년이 흘렀다.
지경원이 사망하면서 모라비 그룹의 후계자는 TH그룹 회장의 후광을 업고 구성호가 아닌 김유경이 되었다. 김유경은 모라비 그룹과 TH 그룹을 합병해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그녀는 모라비 그룹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박부길 회장 명의로 한마음 고아원이 등록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유경은 그곳이 한승희가 자란 고아원이며, 지금도 그녀가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때부터 김유경은 한마음 고아원을 매각하려는 차가운 복수를 계획했다.
이러한 배경을 모른 채, 단지 한마음 고아원이 매각된다는 사실만 알게 된 윤시온은 무언가를 해보려 했지만 여러 사업을 시도했음에도 모두 실패했다.
한승희도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고자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할 팀을 구성했다. 아들 윤시온과 친구인 박유진, 박상철, 그리고 권정헌 대표와 함께 브랜드 런칭팀을 만들고 시장조사를 통해 새로운 패션 브랜드를 계획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윤시온은 오드아이(odd-eye)로서 완전 색맹이 되었다. 한마음 고아원을 지키기 위해 한승희에게는 30억 원이 필요했다.
인연
[사랑하는 나의 아들 윤시온의 7번째 생일] ... 윤시온 ...
최세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시적인 정전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리처드 교수는 순간적으로 최세린이 한승희와 윤시온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눈물이 그녀의 눈에 고인 것을 보고도 이유를 묻지 않고 그저 설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최세린은 리처드 교수와의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고, 사진과 노트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한승희 교수님을 아시나요?" 리처드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최세린에게 물었다. 사실 이 질문은 최세린이 더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최세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승희 교수님은 모르지만, 그의 아들인 윤시온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실습할 때 윤시온 씨와 함께 일했습니다." 최세린은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사진을 다시 가져가 보았다. 정말 윤시온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과 발레 공연을 함께 보고, 판매 실습을 했던 윤시온이 맞았다.
"그렇군요.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이번에는 리처드 교수가 놀란 얼굴로 최세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뭔가를 기억해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거... 동양에서는 사람과의 어쩔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어떤 원인의 줄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뭐죠?" 리처드 교수는 뭔가를 기억하려고 얼굴의 모든 근육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인연因緣이요?"
"맞아요! 인연!!! 그래요... 인연이라고 했어요. 그때 '연'의 의미를 끈이라고 했어요. 맞죠?" 리처드 교수의 얼굴은 마치 퀴즈 쇼에서 마지막 문제를 맞춘 사람처럼 환해졌다.
"끈... 맞아요!" 최세린이 대답했다. 윤시온의 사진을 처음 보고 매우 놀랐지만, 같은 사람을 알고 있는 리처드 교수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 윤시온이 더 궁금해졌다.
"제가 한승희 교수 밑에서 한 팀이 되어 어떤 브랜드를 런칭할 때, 그분이 제가 연구하는 분야에 대해 '인연 과학'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단어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리처드 교수가 사진을 보며 말했다.
"인연 과학이요?" 최세린이 물었다.
"원래 저의 전공은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이에요. 저는 초끈 이론을 브랜드에 접목시켜 뭔가를 밝혀내고 싶었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한승희 교수가 인연이라는 개념을 설명해주셨어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빅뱅 이론과 더불어 만유 이론 중 하나인 초끈 이론은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전자와 소립자 같은 구의 형태가 아니라 진동하는 끈으로 보는 만물 통합 이론이다.
원래 리처드 가브리엘 교수는 27세에 물리학 정교수가 된 천재였다. 그는 어느 날 학교 식당에서 자신과 똑같은 신발을 신은 학생을 발견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신발이 태국의 아주 작은 시골 가게에서 손으로 만든 수제 운동화였기에, 같은 신발을 신고 학교 식당에서 만나는 것은 매우 드문 확률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학생과 같은 시계를 차고 있었다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백만 분의 일에 해당하는 우연에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후 리처드 가브리엘 교수는 만물의 법칙을 찾기 위해 하늘의 행성과 은하수를 관찰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사람의 복잡성과 우연성을 연구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브랜드와 같은 것을 고른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아 확률 이론을 만들고자 했다. 비슷한 브랜드를 구매한 사람들의 이유와 결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패션이 다루는 트렌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트렌드에서 그는 양자역학, 전자기학, 그리고 중력의 통합을 설명하는 초끈 이론을 보았다. 그렇게 연구하다 우연히 한승희 교수의 강의를 청강하면서 패션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사실 최세린 씨가 쓴 아티클의 뫼비우스 이론은 저와 한승희 교수가 예전에 많이 논의했던 주제였어요."
"그래요?" 최세린은 리처드 교수가 건네주었던 노트를 다시 열어 보았다.
"저와 한승희 교수는 트렌드라고 불리는 암흑물질, 그러니까 우주에서는 우주의 빈 공간에 존재하는 물질을 암흑 물질이라고 하죠. 문화, 이슈, 집단 충동, 갈등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해 연구를 함께 했어요. 특히 브랜드가 주는 공감각적인 중력에 대해서도 연구했죠." 리처드 교수는 노트를 다시 읽고 있는 최세린에게 말했다.
"그럼 실제로 이런 이론으로 브랜드를 런칭했나요?" 최세린이 리처드 교수를 쳐다보았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죠. 물리학에서는 이론적으로 가능하면 실제라고 봅니다. 하지만 브랜드는 그렇지 않더군요. 마케팅은 시장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공식도 있지만, 브랜드는 좀 신비스러운 영역 같았어요. 마케팅 이론적으로 브랜드는 인지도를 올리면 충성도가 올라가고, 그리고 구매율도 올라가서 브랜드가 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뉴턴의 만유인력이 설명하는 지구 주변의 이론뿐이죠. 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지만, 브랜드를 만드는 것은 돈이 아니에요. 한승희 교수와 저는 브랜드를 만드는 그 힘에 대해 연구했어요."
"이 노트에 그 내용이 있나요?" 최세린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리처드 교수를 보았다.
"글쎄요, 저는 한국어를 몰라서... 원한다면 빌려가세요. 떠난 한승희 교수의 방을 정리하다 폐지 더미에서 발견했죠. 한 교수에게 돌려주려고 연락했는데 나에게 기념품으로 준다고 메모만 왔어요. 그리고 패션에 관심이 많은 한국인 제자에게 보여주면 재미있을 거라고 말했죠." 리처드 교수는 최세린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럼..." 최세린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리처드 교수가 먼저 말했다.
"네, 빌려가서 노트 복사하고 저에게 주세요. 아마 그 노트는 한 교수의 강의 노트일 것 같아요. 나중에 다시 이 학교로 오면 돌려드리고 싶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운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리처드 교수는 일어나서 책장에서 또 다른 스크랩북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최세린에게 보여주었다. 최세린은 사전 두께만 한 커다란 스크랩북을 한 장씩 넘겨보았다. 그 안에는 브랜드 런칭 휠과 이미지 맵, 그리고 수많은 키워드들이 있었다. 리처드 교수는 최세린이 3분의 1 정도를 보고 있을 때 말했다.
"제가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한 권의 노트와 한 장의 사진이 다시 우리를 새로운 인연의 차원으로 이끌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는 최세린 씨가 한승희 교수 아들인 윤시온과 만남이 있었고, 저는 한승희 교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죠. 우리 둘 다 '뫼비우스'라는 개념으로 아티클을 썼어요. 이 기사는 제가 '브랜드 중력에 관한 초끈 이론 해석과 뫼비우스 접근법'의 소논문에 관한 교수 발표 평가죠. 거의 미친놈 취급을 받았어요."
리처드 교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브랜드가 전자력처럼 가상 중력을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이끈다는 해괴한 이론이니까요. 14세기에 이런 말을 했다면 저는 아마 화형을 당했을 거예요. 하지만 한승희 교수는 저의 이론에 도움을 주고 함께 연구했어요. 한승희 교수는 저에게 한국에서는 '마음이 무겁다'라는 신비한 개념도 알려주었어요. 그리고 인연도 알려주었죠. 그런데 다시 최세린 씨를 통해 한승희 교수와의 인연이 연결되다니 놀랍네요."
"그럼 이것은... 브랜드가 되었나요?" 최세린이 물었다.
"아니에요. 안타깝게도 한승희 교수와 저는 이것을 브랜드로 만들지 못했어요. 이것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허블 망원경이에요." 리처드 교수는 자신의 스크랩북을 천천히 보며 말했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기억을 회상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 학교에서는 4년에 한 번씩 기업을 운영하는 동문들이 브랜드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미래 브랜드에 투자하는 런칭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교수와 학생들이 한 팀이 되어 시장에 실제로 런칭하는 것이죠. 저도 학생으로서 한승희 교수와 한 팀이 되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죠. 그런데..."
리처드 교수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최세린을 바라보았다.
"최세린 씨는 어떻게 윤시온을 만났죠? 서로 퍼즐을 맞춰가려면 최세린 씨의 퍼즐 조각도 봐야겠군요. 시온이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요? 그는 어떤 청년이 되었죠?" 리처드 교수는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조심스럽게 다음 주제를 위해 남겨둔 것 같았다.
"네, 한국에서 저는 어떤 패션 브랜드 매장에서 판매 수습 사원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윤시온 씨는 그때 저의 판매 코치였습니다. 저는 4개월 정도 윤시온 코치의 가이드를 받았죠. 제가 쓴 뫼비우스 디자인 경영도 윤 코치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아쉽게도 한승희 교수님은 못 뵈었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오늘의 사건은 미래의 사건의 원인이지만, 시간의 관점에서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리처드 교수는 흡족한 얼굴로 최세린을 보았다.
"무슨 말이죠?"
리처드 교수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스크랩북을 몇 장 넘기고 대답하지 않았다. 리처드 교수가 한승희 교수와 함께했던 프로젝트 이름은 '사이러스(Cyrus)'였다. 중국에 패션 브랜드를 런칭하는 프로젝트였다. 리처드 교수를 비롯해 미국으로 유학을 온 두 명의 한국인과 중국인 한 명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한국인 중 김우일은 한마음 고아원의 후배였고, 박보배라는 또 한 명의 한국인은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하다가 무작정 미국으로 넘어와 한승희를 찾아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 학교 파트타임 직원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중국인은 중국 사천성에서 아버지가 큰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칭리라는 남자 학생이었다.
최종 결승전에서 사이러스 팀은 핀란드 교수인 셀리가 이끄는 [오로라 팀]과 맞붙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부터 모든 운명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한승희의 단짝 친구였던 김유경은 핀란드 대학에서 셀리 교수 밑에서 패션 마케팅을 공부했었다. 셀리 교수가 미국 대학으로 옮겨가면서 김유경도 그녀의 조교로 함께 이동하게 되었다. 김유경은 셀리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얻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면 5년 안에 셀리 교수의 추천으로 미국 대학에서 부교수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이곳으로 오게 된 김유경은 고등학교 때 헤어졌던 한승희가 이곳에 패션 브랜드의 정교수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승희는 윤민수와 결혼하면서 윤민수의 미국 성인 '커리먼'으로 성을 바꾸어 미국에서는 '한 커리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친했던 한승희와 김유경은 가장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한승희에게 이번 중국 브랜드 런칭 프로젝트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마음 고아원 출신의 원우들에게 직장과 시민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러스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막대한 금액의 투자가 들어오고, 한승희는 취업 비자를 원우들에게 줄 수 있었다. 한편 셀리 교수는 꼭 성공해서 한승희와 동급으로 학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기에, 김유경에게도 이번 경쟁 프로젝트는 매우 중요했다.
대부분의 경쟁 프로젝트가 그렇듯 이런 것은 과열되어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이다. 김유경은 프로젝트 완성을 위해 자신의 아버지 회사 마케팅 팀의 도움을 받아 전략서를 만들었고, 급기야 북유럽에서 대중이 모르지만 컨셉이 분명한 디자이너 브랜드를 복제했다. 이것을 리처드 교수가 알게 된 것이다. 리처드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한승희에게 보고하고 운영회에 통보하려고 했지만, 한승희는 리처드에게 보고를 잠시 보류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유경이 이번 건에 대해 말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마음 고아원 출신의 김우일의 취업 비자와 더불어 최근에 어려워진 한마음 고아원을 돕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한승희 교수는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리처드 교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다가 갑자기 질문했다. 최세린은 리처드 교수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글쎄요... 지금 서울에 계신 것으로 본다면... 잘 모르겠어요."
"맞아! 바로 그 점이야.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서로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죠. 물리학은 과학이죠. 과학자로서 나는 한승희 교수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셀리와 김유경 씨의 행동은 불법입니다. 당연히 불법이고 경연대회에서 나가야 했죠. 하지만 한승희 교수는 그들을 설득했어요. 그 사이에 그들은 노출된 증거를 사라지게 했어요. 결국 우리 팀 내부에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우리는..." 리처드 교수는 또 말을 멈추었다. 최세린도 그의 눈만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겼죠. 완벽하게 이겼죠. 저는 이 비리를 말하지 않았지만, 중국인 칭리가 모든 것을 알게 되어서 대학 본부에 보고했죠. 김유경은 학교에서 퇴출되었습니다. 셀리는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담당자의 과열 경쟁심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도 결국 다른 학교로 옮기게 되었죠. 두 명의 한국인 제자는 각자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났어요. 한승희 교수는 한마음 고아원의 어려움이 심각한 것을 알고 바로 한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16년 동안 소식이 없었어요. 오늘 처음으로 최세린 씨에게 한승희 교수의 이야기를 듣네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아들 소식이지만..."
"그럼 프로젝트는...?"
"칭리가 다 챙겼어요. 오히려 잘 되었죠. 두 명의 한국인도 중국에서 칭리와 일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잘 모르겠어요. 너무 오래된 이야기가 되었어요. 김유경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잊을 만하면 듣습니다. 작년에도 이 학교에 기부금 회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정말 그녀는 이 대학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알기로는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 유통 회사의 대주주라고 들었어요. 하여간 그 빅뱅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다른 궤도를 돌게 되었어요."
"리처드 교수님과도 어려운 관계가 되었나요?"
"그렇지 않아요. 한 교수는 여전히 저의 스승입니다. 저는 한승희 교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어요. 한승희 교수와 함께 일하면서 '죠닉스(Xonyx)'라는 새 이름도 갖게 되었고, 자기다움도 알게 되었죠. 그분의 교육은 매우 독특했어요. 글쎄, 뭐랄까? 브랜드를 철학에 가까운 학문으로 만든 분이죠. 다시 만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언제인가 저도 그분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오겠죠. 그것을 인연이라고 하지 않나요?"
"맞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연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새 이름을 갖는 것은 무엇이죠? 죠닉스는 무슨 의미죠?"
"그것은 제가 저에게 준 이름입니다. 한승희 교수가 가르쳤던 교육은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은 완전하지 못해요. 지구에서 바라보는 태양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지구가 마하 87 이상으로 움직이는 것이죠. 이것을 인간이 지구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느낄 수도 없죠. 제가 한승희 교수를 통해 배웠던 브랜드니스(Brandness), 브랜드뷰(Brandview), 브랜드싱크(Brandsync), 그리고 브랜드십(Brandship)은 마하 87로 태양계를 도는 그런 기분입니다. 매우 빠르지만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지만 매우 빠른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이것이 우주의 비밀이죠."
리처드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했다. "또 물리학으로 넘어왔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다음 미팅 장소로 가야할 것 같네요."
리처드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세린도 함께 일어섰다. 리처드 교수는 옷걸이에서 겉옷을 꺼내며 문쪽으로 먼저 나갔다. 그리고 다시 최세린을 보며 말했다.
"혹시 말이죠. 한승희 교수님을 만나게 되면 늙은 제자가 안부를 전하고 꼭 뵙고 싶다고 말해 주세요. 그리고 지금은 도울 수도 있는 친구들도 많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도울 수 있는..."
"그렇게만 말씀해 주시면 알게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리처드 교수는 시계를 보고 약속에 늦은 것을 알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깐 최세린을 바라보다가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최세린 양도 인연을 믿나요?"
“인연을 믿냐구요?”
“네, 인연이라는 운명을 믿나요?” 리처드 교수는 다시 물었다.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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