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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나이듦과 물듦

about/나이듦에서 나듦으로

by chief-editor 2023. 9. 2.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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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과 물듦

 

가을로 물듦

 

 

중학교 1학년 친구들을 40년이 지나 54세가 만나보니 모두 막장 드라마 주연으로 살았다. 

이혼하고 독신으로, 재혼했지만 또 이혼한 친구, 아내와 사별한 친구,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다시 회복한 친구, 당뇨로 몸이 완전히 망가진 친구, 사업이 망했다가 신불자로 사는 친구, 뒤늦게 시험관 아이를 낳아서 이제 초등학생 학부모가 된 친구. 모두 아침 드라마 한 꼭지에 해당하는 스토리를 가지고 살아내고 있었다.

 

40대까지는 사회에서 잘 나가는 친구들만 동창회에 참석했는데, 50대 중반이 되니깐 시간이 삶을 평준화시켜서 우리를 다시 유치한 중학교 1학년으로 만들어 버렸다. 친구 덕을 볼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모인 친구들은 예전 기억을 뇌 속에 낡아진 뉴런 신경 세포를 비벼가면서 바닥에 깔린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며 이야기했다. 내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나에 관해서 친구들이 이야기했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내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내 기억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다.

 

친구들은 돌림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주제를 계속 반복했다.  투자 정보를 시작해서 일자리, 자녀, 연금, 골프, 운동과 정치 이야기. 이야기가 다 떨어질 때 부모님 이야기가 나왔다. 부모님들은 치매에 걸렸거나 중환자실, 요양원 그리고 요양병원에 계셨다. 50대의 인생은 정말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내 앞에 친구들이 떠들고 웃는 모습을 보면서 ‘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는 이야기가 뭔지 알게 되었다. 사람은 신생아로 태어나서 노인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신생아로 태어나서 늙은 신생아로 죽는다. 노화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도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내가 풀고 싶은 지점이 바로 여기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죽을 수 없을까?

 

 내 앞에서 오래간만에 남자들의 수다를 떨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은 중학교 1학년 점심시간의 모습이다. 관심을 끌고 싶은 아이가 세운상가에서 사 온 성인잡지를 점심시간에 풀었을 때 아이들이 몰려와 욕과 감탄을 하면서 떠들었던 그 분위기로 골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골프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골프 이야기를 마블 시리즈에 나오는 영웅 이야기처럼 하고 있다. 모두가 지나치게 과장된 허풍인데도 이야기를 끊지 않고 다 받아 준다. 3년 전에 홀인원을 한 이야기를 아직도 저렇게 생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로울 정도다. 급기야 친구들은 인생은 골프처럼 직선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나는 나이가 들면 현명해지는 줄 알았다. 공자의 말을 잘못 이해했다. 공자는 나이에 따라서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 되었다고 했다. 공자의 50세와 나의 50세가 다르지만 50세가 되어보니 나의 40세 불혹도 아니고 50세는  지천명이 아니라 여전히 모기지에 갇힌 미자립이었다. 

플라톤도 50세가 넘어야 선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50세가 되어보니 나에게는 수천 년 전 50세와 지금의 50세는 다르다. 공자가 나이별로 단계를 넘기 위한 노력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저렇게 주제 하나를 가지고 서로 즐기는 내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다. 경험과 수많은 인터뷰 결과로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노화 현상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이 침침해서 노안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늙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만 자신이 인생에서 겪어보지 못했던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나는 다행히 2000년부터 일기를 매일 썼기에 노화의 체감을 뚜렷하게 경험했다. 그래서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2000년도 일기를 다시 보면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유치하다.

어떻게 이 나이에 이런 쪼잔한 생각을 했을까? 작년 일기도 마찬가지다. 한 달 전 일기를 보아도 창피하다. 일단 나의 일기는 죽기 한 달 전에 모두 태울 예정이어서 나만 창피하면 된다. 모두 태울 그 많은 일기를 보관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일기를 볼 때마다 스스로 창피한 것은 좋은 현상이다.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이가 들면서 철이 들고 있었다. 

 '철들다'의 ‘철’은"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한자 哲(밝을 철)과 설명하기도 한다. 내가 고른 해석은 열매가 제철을 맞아 여물듯 계절을 의미하는 ‘철’로 보는 것이다. 인생을 4계절 사이클로 설명하듯이 나는 나이 듦을 계절의 ‘철’로 설명하고 싶다.  

 

인류 사회 문화적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중년(30~49세) 장년(50~64세) 그리고 노년(65세 이상)으로 구분했다. 2015년 유엔(UN)은 평생 연령기준을 100세 기준으로 18~65세를 청년, 66~79세를 중년, 80~99세를 분류했다. 이렇게 나이로 인간을 구분하여 신체 및 사회적 능력을 구분하는 것은 피부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나이를 처먹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이 있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나이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너무나 흔하게 본다. 과일처럼 나이가 든다고 철에 맞게 익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연의 흐름처럼 나이가 들면 저절로 철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가 들면서 철이 들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내 앞에서 철없던 중학교 1학년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 친구들과 나는 철이 들었을까? 그런데 철이라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철이 들었다’라는 정의를 2000년도에 했다. 바로 자기다움이다. 나는 ‘자기다움’에 관해서 두 권의 책을 썼는데 한 권은 30대에 쓴 [새벽나라에서 사는 새벽거인/2001년]과 또 한 권은 40대에 쓴 [자기다움 /2012] 책이다.

 이 두 권의 책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은 원본으로 태어나서 복사본으로 죽어간다] 분명 태어났을 때는 세상에 오직 한 명으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가 되면 비슷한 삶을 살아간 여러 명 중의 한 명으로 죽는다. 2023년 8월에 연극배우 윤석화는 뇌종양 투병 중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답게 살다가 윤석화답게 죽겠다.” 

 

같은 잡지에서의 저자 셸리 케이건 교수는 2013년 6월에 이렇게 인터뷰했다. 

“사람들은 죽음에 관한 생각을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죽음은 너무나 두렵고 불편하고 우울한 주제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인간은 어차피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만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스스로 진정한 가치를 찾은 뒤에 그것을 목표로 삶을 다듬어 나가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결국 제가 학생들이나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도 그들의 인생이 앞으로 어떠해야 할지 생각하게끔 하려는 것입니다.”

나이 드는 것은 죽어가는 것일까? 철이 들어가는 것일까? 죽어가면서 철이 드는 것일까? 아니면 철이 들면 죽는 것일까? 예전에는 이런 질문이 관념적이고 수사학적으로 들렸지만, 50대가 넘어서는 무슨 질문인지 알 것 같다. 대답할 수 없지만 의미를 알 것 같다.

 

 나이 듦으로 철이 들어가는 자기다움이 존재할까? 제철 과일처럼 나는 50대 제철에 맞는 과일을 맺었을까? 자녀교육, 자가주택, 노후 안정은 50대에 준비하는 노후설계이다. 노후설계라는 것은 보험 및 금융회사에서 자기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푸집이다. 회사의 경영설계 차원에서 본다면, 자신들의 현재 수익을 위해서 여러 사람의 노년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지금 그들의 자금을 끌어온다. 이것이 상부상조 아니면 윈윈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중장년들은 노후설계라는 프레임에 갇혀 돈 걱정 없는 노년을 맞이하기 위해서 열심히 청년과 중년에 돈을 번다.

 

설계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갑작스러운 경제 문제와 인생 충격으로 초기 설계한 그림은 대부분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그들이 설계용으로 투자한 돈은 환급받지 못하고 중간에 모두 접게 되는 것이 상당수의 노후 설계다. 이런 노후설계와 철이 드는 자기다움은 아무 관계가 없다. 노후설계만을 위한 삶은 수명연장이 아니라 연명 관리일 뿐이다. 

 

  중장년에게 노후 설계보다는 죽음 설계를 제안하고 싶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결정하면 삶은 매우 심플해지고 강력해진다. 좋은 과실을 맺기 위해서 옆에서 볼품없는 열매를 따주어야 하는 것처럼, 잘 죽기 위해서 오늘을 살면 주변에 하찮고 쓸데없는 일들은 저절로 떨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플라톤의 사상을 빌리자면 ‘철학은 죽음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면 또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내가 말하는 철학은 존재론, 인식론, 논리학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래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라는 자기다움의 자기 생각을 말한다. 

 

 

“야! 너는 언제 골프 배울 거야? 이제 친구들 만나면 이렇게 운동하면서 살아야잖아!”

 

그러자 옆에 있는 친구는 다른 질문을 했다.

“너는 그런데 … 취미가 있냐?”

 

 

자식 자랑으로 시작해서 왕년의 자랑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다.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은 아니고 중년들이 무슨 이야기로 즐거워하는지 친구가 아니라 관찰자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친구들의 즐거운 대화는 마치 서로 간지럽히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들 놀이처럼 보였다. 골프와 줄넘기 그리고 숭어회 이야기를 이토록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받아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서로의 추억을 주머니 속에 있는 왕 구슬과 왕 딱지 보여주는 것처럼 자랑하는 친구들을 계속 지켜보는 중이었다. 나는 헤어지기 30분 정도에 이런 질문을 하려고 참고 기다렸다. 

“혹시 자기 혼자서 하는 의미 있고 특별한 일은 뭐가 있니?”

 

나는 먼저 이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친구가 나에게 골프를 언제 배울 거냐고 물었기에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말을 못 했다. 나는 골프를 안 친 것은 아니다. 경영컨설팅을 할 때 클라이언트 대표가 자신과 같이 골프를 치자고 쓰고 있던 골프 클럽을 2개나 주었다. 내 기억으로는 20번 정도를 따라다녔지만 아직도 룰을 모른다. 그렇다고 다른 취미 생활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병원 처방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자전거 타기, 산책 외에 특별한 취미활동은 없다. 나에게는 취미보다는 흥미를 느끼는 것이 있다. ‘나를 알아가는 것’이다. 

 

나를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는 것은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글을 만들어 가는 것도 흥미롭지만 글을 쓰는 것 자체도 재미있다. 골프 고수일수록 골프를 알고 있기에 골프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뭐든지 아는 만큼 보이고 즐기는 만큼 누릴 수 있다. 

 

글을 쓸 때 나는 골퍼들이 골프 클럽에서 거리와 상황에 따라서 클럽을 고르는 것처럼, 여러 개의 만년필을 가지고 시작한다. 주제에 대한 느낌으로 펜을 선택한다. 감동의 경사와 기억의 흐름에 따라서 만년필을 고른다. 가끔은 하나의 만년필을 가지고 끝까지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쓰다가 멈추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만년필을 바꾼다. 그렇다고 글이 잘 써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만의 글쓰기 예전禮典이다. 글을 잘 쓰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을 맛보기 위해서다. 그렇게 만년필로 글을 쓰고 손에 꼭 묻게 되는 잉크를 볼 때 기분이 좋아진다. 칼에 베인 손가락 혈흔처럼, 생각이 손에 묻어있다. 산소가 있는 동맥은 선홍색으로 보이게 되고 산소를 잃어버리고 이산화탄소가 있는 정맥은 검붉은 색으로 보인다.. 손등 위 피부 위로 솟아오른 정맥이 파란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검붉은 정맥이 살색을 거치면서 파랗게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만년필로 쓰는 이유는 잉크가 내 심장에서 피가 뿜어져 푸른 정맥 핏줄을 타고 손등 정맥과 손가락을 통해 펜촉(Nib)으로 흘러나오는 ‘착각’ 때문이다. 글을 쓸 때마다 손등 위에 씰룩거리는 정맥이 마치 스포이트를 누를 때 나오는 파란 피처럼 보인다.  그래서 내가 즐겨 쓰는 잉크는 로열 블루다. 

 

볼펜은 볼을 굴려 잉크를 종이에 바르면서 쓴다. 연필은 흑심을 종이에 비벼 칠하며 쓴다. 만년필은 펜촉으로 종이를 긁어 적시면서 쓴다. 만년필을 좋아하는 이유는 펜촉을 종이에 갈아서 나의 글씨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라미 만년필 EF 촉을 쓰더라도 글의 주제와 종이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다른 촉이 된다. 강성이 있는 스테인리스 만년필촉이 연필 흑심처럼 그렇게 빨리 내 글씨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1년에서 길게는 3년이 넘게 사용해야만  나의 글씨체를 구사할 수 있는 펜촉을 가질 수 있다. 금촉인 몽블랑은 긁어 쓰지 않고 조심스럽게 묻혀 쓰기 때문에 수년을 써도 몽블랑 체이다. 하지만 라미는 나의 필압을 온전히 받아 사용하기 때문에 내 글씨에 따라 펜촉이 만들어진다. 

마치 구석기시대의 동굴에서 뾰족한 돌창을 만드는 고대인의 정성처럼, 나는 만년필을 그렇게 종이에 문지르면서 나의 글씨체를 만들어 간다.

펜촉은 종이에 닳아지면서 나를 닮은 글씨체를 만들어준다. 기분 탓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모든 것은 노화가 되지만 글씨체는 젊어진다.

 

만년필을 좋아한다고 바둑판같은 원고지에만 글을 쓰지 않는다. 만년필로 쓰는 글은 초벌이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키보드로 화면을 보면서 글을 쓴다. 멍하게 모니터를 본다고 생각이 우러나오는 것도 아니다.  나는 키보드로 글을 쓸 때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마음으로 키보드를 고른다.

손가락의 압력으로 생각을 눌러 글을 찍어 내는  느낌을 주는 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한다. 피아노마다 건반을 누르는 압력 차이가 있는 것처럼, 나는 키보드를 칠 때는 글 주제에  따라 갈축, 청축, 적축, 황축 그리고 저소음 적축에서  글 톤에 맞게 고른다. 키보드가 만년필처럼 많은 것도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수집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사진과 자전거에서는 장비 빨 도움을 받았지만, 글과 장비빨은 상관없는 것 같다. 글을 음악처럼 즐기고 싶기 때문에 스스로 최면을 걸린 것이다. 글 쓰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피아노를 치는 느낌으로 글을 쓰려고 할 때 기분이 한결 편해진다. 

 

키보드로 글을 쓰는 가장 큰 매력은 눈을 감고도 쓸 수 있다. 손가락이 자판의 위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눈을 감고 글을 느끼면서 힘을 빼고 글을 쓸 수 있다.

마치 피아노 연주자가 악보도 없이 눈을 감고 연주하는 것처럼 나도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생각을 더듬으면서 글을 쓴다. 눈을 감고 글을 쓰는 맛은 마치 박쥐가 초음파를 이용한 ‘반향위치결정법(echolocation)’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어두운 곳에서 글자를 낚아채는 맛이다.

 

피아니스트는 악보를 보지 않고 외워서 연주한다. 그것을 암보(暗譜)라고 한다. 1837년, 클라라 슈만(1819~1896)은 18세 때 음악 역사상 처음으로 악보 없이 연주한 피아니스트다. 그는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악보 없이 외워서 연주했고 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외워서 연주하면 힘차게 날갯짓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입니다” 

눈을 감고 연주하는 슈만은 하늘을 오르는 것 같지만, 나는 박쥐가 동굴에서 사냥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쓸만한 단어와 기억을 찾아 날아다닌다. 

거듭 말하지만 글 쓰는 펜이나 키보드나 모두 어렵고 두렵다. 키보드 연주(?)와 박쥐 글쓰기 같은 이런 착시와 착각은 글을 즐기기 위한 나만의 뽕(뻥은 아니다) 일뿐이다.

그리고 여러 개의 자판을 사용해 보았지만, 글이 잘 써지는 자판은 (아직까지) 없었다. 글쓰기를 위해서 기계식 키보드보다는 산책과 나이키 러닝화(?)를 추천한다.

 

“글 쓰는 거 좋아하잖아!”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는 친구가 나 대신에 대답했다. 

“음, 글 쓰는 것보다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을 쓰는 것이지.” 이렇게 대답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이다. 내가 생각해도 재수 없고 잘난 척하는 대답이었다. 

“뭔 말이야?” 처음 골프를 배워보라고 했던 친구가 질문했다. 

“너희들 혹시 회고록 써 볼 생각 있냐?” 나는 대답 대신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나는 2시간 동안 회고록이 중장년에게 중요한 이유와 방법 그리고 가치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생각해 보니 친구들은 내가 골프 이야기를 참고 들어준 것처럼 지루함을 견디어 주었다. 회고록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회고록을 쓰기에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다.

회고록을 쓰기에 할 말이 별로 없다

죽을 때는 이 땅에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다.

 

나는 회고록에 관심 없어하는 친구들에게 윌리엄 진서가 쓴 [스스로의 회고록]을 카톡으로 공유해 주고 헤어졌다.

 

인생의 계절 중에서 50대의 삶은 가을이다. 누구에게는 풍요로운 가을이겠지만 나와 내 친구들에게는 기후 온난화로 인해서 사라진 가을처럼 겨울에 가깝다. 우리는 나이 듦으로 단풍처럼 물들었다. 멋지다는 말이 아니다. 단풍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견뎌내야 하는 겨울이 온다는 전조다.

 

중장년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어떻게 그리고 무엇에 물들어 있는지 자신을 살피는 것으로 죽음을 시작해야 한다. 대부분 중장년은 타인의 꿈과 비전의 복사본이 되어서 자신이 아닌 타인의 것에 물들어져 있다. 시작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대부분 남의 것과 대중이 원하는 것은 자신을 물들였다. 

 


 빌딩을 87채를 가진 분을 만났다. 그분은 자신의 꿈은 빌딩 100채를 갖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진지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그에게 질문을 했다. “죽을 때 100채를 소유하면 기쁘게 죽을 수 있을까요?” 감히 그 누구도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한번 보고 다시 볼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생각이 정말 궁금했다. 

나의 질문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인지 아니면 대답할 수 없는 자신 때문에 당황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표를 200채로 올려야 할 것 같네요.” 

 

봄이 오기전에 눈 사람 100개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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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 목적연합 유니타스 라이프

Unitas Life for Midlife, 중장년의 삶은 나이 듦에서 나듦으로 변화됩니다. 유니타스라이프Unitas Life의 라이프L.I.F.E는 Learning Innovation For Evolution입니다. 평생 학습이 아니라 인생 혁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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