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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노인과 어른

about/나이듦에서 나듦으로

by chief-editor 2023. 11. 17.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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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시90:12, 모세의 기도]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깨닫게 해 주소서.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노인이 되면 어느 날 갑자기 바다 앞에 서게 된다.

그 바다는 젊은 날 여름휴가에서 보았던 그런 바다가 아니다.

비가 내리고 아무도 없는 겨울밤 바다이다.

 

은퇴 이후에 노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남은 인생은 이런 바다처럼 보인다.

겨울비가 내리는 밤바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 앞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를 때가 온다.

파도가 발끝에서 깨지면서 남기는  물거품과 흔적은 노인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한다.

 

노인이 보는 바다는 죽음을 품고 있는 시간이다.

그 바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바다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노인이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자연의 법칙 앞에 서게 된다.

 

노인의 바다를 가장 잘 표현하는 노래는 가수 김민기가 불렀던 ‘친구’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노인마다 바라보는 바다는 모두 다르다.

신앙, 신념, 가치 그리고 소명에 따라 노인이 보는 바다는 다른 하늘과 맛 닿아 있는 바다다.

어떤 노인에게는 바다는 검푸른 죽음으로 보이고 또 어떤 노인에게는 바다 밑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그래도 노인이 되면 세상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다처럼 보인다.

여전히 넓고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세상은 이제 위험한 바다가 되었다.

 중장년이라면 열심히 살다가 자신이 바닷가 노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반드시 온다.

 

 

 

은퇴, 명퇴, 퇴임 이후에 세상은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어부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바다처럼 무섭고 힘들고 막막하다.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작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큰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노인 산티아고는 큰 물고기의 힘 때문에 먼바다까지 가서 잡았다. 그러나 상어의 공격에 의해서 큰 물고기는 뜯겨 나갔다.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는 쿠바 어촌에 살았던  ‘그레고리오 푸엔테스 Gregorio Fuentes’라는 실존 인물이다. 그는 1898년생으로 2002년 1월 13일 향년 104세로 노인으로 사망했다. 헤밍웨이는 61세에 노인이 되기 전에 자살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1952년 9월 8일에 발행했을 때 그레고리오 푸엔테스의 나이는 54세였고 헤밍웨이는 53세였다.

헤밍웨이 작업기간을 감안한다면 [노인과 바다]의 경험담을 들려준 그레고리오의 나이는 약 50세이다.

그의 이야기를 회고록으로 썼다면 제목은 아마도 [중년과 바다] 혹은 [아저씨와 바다]가 되었을 것 같다.

 

중년이 된 내 친구 중 몇 명은 소설[노인과 바다]에서 나오는 노인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

주식, 다단계, 프랜차이즈, 창업 그리고 투자를 했다가 상어들에게 모두 뜯기고 뺏겼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높은 산은 아름답다. 하지만 스위스에서 보았던 높은 산은 무서웠다.

검은 산 위에 눈이 덮인 산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높은 산을 보면 올라가고 싶지만 나는 멀리서 풍경으로 보는 것으로 좋다.

우러러보는 산과 달리 바다는 내려다본다. 바다는 높음과 깊음을 알 수 없지만 넓고 조용함에 압도당한다.

산을 보면 웅장함을 느끼지만 바다를 보면 외경심으로 그 앞에서 잠잠해진다.

중년까지 높고 낮음의 인생 산을 경험했다면, 장년부터 노년까지는 바다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바다는 생명의 코 앞에 있는 죽음이다.

 

 

[노인과 바다] 그것은 [노인 그리고 죽음]이다.

노인이 되어서 죽음과 마주치기 보다는 장년부터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염세적으로 우울한 인생을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죽음으로부터 ‘진짜 삶’을 배울 수 있다.

죽음 이후의 자기 존재에 대해서 준비하고, 나이 듦과 죽음이 주는 깨달음을 즐거워할 수 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글과 사이트도 나의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하기 위한 작업 중에 하나다.

 

나와 죽음의 관계는 흰동가리(영화 니모)와 말미잘과 같은 공생 관계다.

내가 죽음을 인식함으로 영원함과 부활을 의식하면서 살고 있다.

 

부모는 자기 삶으로 가르친 것만이 자녀의 삶에 남는 것처럼,

부모는 자기 죽음을 다루는 것으로 자녀의 삶을 도울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언제 죽을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

노인이 되어서 죽음을 배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직 노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른 50대에 죽음을 선행학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전까지는 잘 살기 위해서 살았다면 50대 이후부터는 잘 죽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여전히 50대에도 해변에 놀고 있는 아이들처럼 모래성을 쌓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SNS에서는 여전히 남은 삶을 찬미하고 즐거워하고 자랑하고 있다.

그것이 인생을 즐기는 것이라고 서로가 규칙을 만들어서 게임처럼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중이다.

그러게, 살다가 갑자기 눈앞에서 바다를 맞이하게 된다.

 

노인과 어른.

노인 老人과 어른은 다르다. 가끔 아이들에게도 ‘어른스럽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른은 나이가 들어서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50대 장년이라면 노인 老人이 되어 전두엽이 쪼그라지고 꼰대가 되는 노인(怒人 성낼 노 사람 인)으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어른으로 남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모든 노인은 어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주변에 어른다운 어른을 만나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다.

 

노인은 나이 든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른은 철이 든 사람이다. '철들다'의 ‘철’을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여러 유래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열매가 제철을 맞아 여물듯 계절을 의미하는 ‘철’이라고 말하는 주장에 더 마음이 간다. 어떤 사람은  한자 哲(밝을 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 간혹 악동과 꼴통에게 가까운 노인(怒人)이 된 노인을 본다.

늙으면 애가 된다는 말이 있지만 그 애는 우리가 보았던 그런 애가 아니다.

고집스럽고 아직도 자기주장이 강한 늙은이들이다.

치매(癡어리석을 치, 어리석을 매)를 영어로는 “디멘샤”(dementia)라고 하고 우리 옛말로는 노망(老妄) 혹은 망령(妄靈)이라고 했다. 영어 “dementia”는 라틴어의 de(아래로)와 mens(정신)에서 나온 단어로 그대로 번역하면 ‘정신적 추락’이다. 치매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도 만만치 않다.

치매를 어떻게 막을 수는 없겠지만  노인(怒人 )이 된 노인 老人은 되지 말아야 한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 나이 들어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이 들어서 자기 열매를 맺는 어른이 되는 방법은 다양하다.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죽음을 통해서 성숙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죽음을 배우는 것은 유언장 미리 써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물론 죽음을 현실로 경험하기 위해서 한 달 동안 신변 정리, 자신의 납골당 꾸미기 그리고  관에 들어가는 체험 등이 있다.

이런 것은 어느 정도 쇼킹한 자극을 줄 수 있지만 정말로 맛보기일 뿐이다.

이렇게 사실적인 죽음 연습도 사람에 따라서 다른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죽음은 이런 두려운 스릴러가 아니다. 오히려 매우 간단하다.

 

[나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제는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내 삶의 모든 것이 재정의되고 재배치된다.

앞서 말했지만 죽음은 기다리다가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배워서 익숙해져야 한다.

매일 죽는 법, 자기답게 죽는 법 그리고 영원히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을 끝으로 보지 않고 다른 시작으로 보는 것이 죽음을 통해 어른이 되는 길이다.

 

 

어른과 바다

늙어가면서 배우는 것들이 있다. 자신의 미래를 더 멀리 볼 수 있다.

노안 老眼은  수정체의 노화 현상으로 인한 시력의 장애가 생긴 눈이다.

수정체의 노화로 초점이 망막의 뒤에서 맞추어져 가까운 곳을 잘 볼 수 없다.

생물학적 눈은 가까운 곳을 보지 못하는 노안이 되어간다. 노안에 죽음이라는 렌즈를 끼면 더 멀리 볼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자신의 삶을 연봉, 은행 대출금, 진급 같은 것으로 예측(forecasting 현시점의 미래 예측)했다. 눈은 건강했지만 대부분 1~3년 인생을 바라보는 근시안적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장년이 되면 죽음을 기점으로 백캐스팅(Backcasting 미래에서 현시점을 예측)으로 예측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죽을 것인가? 내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은 나와 어떤 관계를 맺을까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살 수 있다.

 

죽음 이후에 삶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면 어른이 되는 4개의 문을 볼 수 있다.

짧은 단어로 말한다면 ‘소명, 봉사, 유적 그리고 제자’이다. 이것을 짝으로 보면 ‘소명과 봉사’ 그리고 ‘유적과 제자’라고 구분할 수 있다. 설명을 위해 이렇게 구분했지만. 이 4가지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나이 듦의 비전, 소명

나이 듦의 이점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과 인물들의 역할을 비로써 왜 그때 그렇게 있었는지 알게 된다. 이런 일들은 시간이 지나야 만 알게 되는 것들과 잃어보아야만 소중한 것을 알게 되는 것들이다. 젊었을 때는 미래, 사회, 가치, 커리어, 능력 그리고 돈을 중심으로 ‘비전’을 보려고 했다.

 

내가 보는 비전이 남의 것인지 아니면 환상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밝고 눈이 부셔서 시릴 정도로 비전은 찬란했다. 반짝인다고 다이아몬드가 아닌데도 우리는 눈앞에 반짝이는 것들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죽음을 인식하면 그런 모든 것들이 환상과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회고록을 쓰고 읽으면서 내가 무엇에 환장 換腸(환심장(換心腸)의 준말로 직역하면 마음과 창자가 바뀌다 뜻이다.)했는지를 보게 된다.나이들면 비로소 많은 것을 잃고 후회하면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때 청년 때 품었던 비전처럼 섹시하지는 않지만, 오롯이 소명이 들을 수 있다. 피하고 싶었지만, 했던 것, 언제나 내 주변에 머물렀던 것, 막연히 하고 싶었던 것, 돈이 되지 않아서 무시했지만, 마음이 갔던 것, 남들과 비교해서 언제나 우선순위에 제외되었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것 그리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꼭 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

 

인생을 돌아보면서 세상에서 나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미세 조정을 통해서 더 명확하게 소명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 몇 개 있다.

 

나만 보는 것은 무엇일까?

나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나만 분노하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살아왔던 모든 삶에서 나를 부르는 소명(召命, Calling)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그 소리를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

 

“나는 죽기 직전까지 무엇을 하고 싶을까?”

 

 

봉사

나의 소명이 진짜인지를 확인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자원봉사다. 나의 소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돈을 받지 않고 남들과 나누고 값없이 도와줄 때 내 안에 흘러나오는 감정으로 진위를 확인할 수 있다. 돈을 낼 수 없는 사람에게 내 소명으로 봉사할 때 기쁨이 있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을 받는 것보다 봉사하는 것이 더 기쁜가?

봉사는 내가 하는 일을 돈의 중력이 없는 무중력 상태를 만든다. 봉사는 무엇보다도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왔던 노인을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른이 될 수 있게 한다.

 

봉사하자마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과 사례를 보면 상당한 부작용이 있다. 겉으로 도와주고 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본전을 따지는 마음, 봉사를 비용으로 셈하는 옹졸한 나의 영혼, 돈을 받지 못하지만 존경받고 싶어 하는 인정욕구, 섭섭함과 아쉬움으로 지쳐가는 마음 등. 독감 배신 맞고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오히려 봉사가 나를 하찮고 가벼운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현상이다. 소명은 돈에 얽매이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이 들면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소명 발견 외에도 여러 장점이 있다.  사회적 연결성 강화, 새로운 관계 확보, 건강한 정서적 상태 유지 그리고 신체적 활동 촉진 등. 다양한 효과는 이미 입증되었다.

문제는 노인이 되어 대상자가 원하는 ‘왕성한’ 자원봉사를 시작할 수 없다. 오히려 노인은 자원봉사의 대상자가 될 수 있다.

봉사는 50대부터 시작하는 것을 제안한다. 노인이 되기까지 주도적으로 봉사를 하면서 노인이 돼서도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봉사를 자신의 노력과 열정으로 하면 어느 순간에 지치고 소모된다. 봉사는 내가 해야만 하는 것,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소명으로 해야 한다.

 

 

 

유적 (남길 유, 跡 발자취 적)

어른은 유산産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유적 (跡)이 되어야 한다. 어른이 남길 유적을 영어로 표현한다면 러셀 russell (등산에서, 선두에 서서 눈을 쳐내어 길을 다지면서 나아가는 일)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작업과 이 사이트도 나의 유적 중의하나다.  

내가 돈을 받고 일했던 모든 것들을 다음 세대를 위해 유적을 만드는 일이다.

나의 지식과 경험을 매뉴얼로, 동영상으로, 글로 남기는 작업이다.

유적은 은행에 있는 유산과 달리 내 안에 있다. 내가 그것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절대로 발현될 수 없다.

 

유적을 만드는 과정과 봉사하는 과정에서 학습한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가『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ka Nikomacheie에서

"학습은 번영 때는 장신구에 불과하지만, 역경 속에서는 피난처가 되어주고 노년에는 대비책이 되어준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유적 작업을 하면서 예전의 지식과 경험은 봉사를 통해서 작동되면서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만들어 낸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을, 매뉴얼(사례집, 설명서, 안내서 혹은 동영상)을 만들려고 할 때 엄청난 공허함과 막연함에 갇힌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글로 쓰려고 하니 별거 아니라는 자괴감이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A4용지 5장을 넘지 않는다. 그럴 때 자신의 실체를 마주한다. 이런 현상과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나타난다. 학습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보강하고 보완하기 위해서 다시 책과 자료를 찾아야 한다.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에 새롭고 다른 지식으로 업데이트 작업을 해야 한다.

 

 

 

제자, 늦둥이.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 그들은 부부에서 부모가 된다. 하지만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 학습 그리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 아이를 낳고 다음 날 아침에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자녀가 필요하다. 나이 들어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가짐으로 어른이 될 수 있다. 어른이 되어서 얻는 자녀는 생물학적 자녀가 아니라 사회적 자녀다.

나의 자녀는 1억~2억의 정자와 하나의 난자가 만나서 탄생했다. 그러나 사회적 자녀는 봉사와 유적 작업에서 만난 사회적 후계자이다.

 

나의 자녀가 내가 평생 했던 이 일을 가업으로 받을까? 물론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했던 모든 것을 받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후계자를 찾는 중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서다. 나의 자녀에게는 유산을 준다면 나의 제자에게는 유적을 전해줄 수 있다.

 

어른이 되기 위한 유적은 자기 양자와 양녀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작업한 것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나의 양부모, 어른들을 통해서 받은 것이다. 그들의 책과 작품 그리고 상품을 통해서 나는 여기까지 살았고 성장했다. 이제 노인이 되기 전에 나의 후계자에게 내가 받은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

 

 

어른과 바다.

헤밍웨이는 쿠바 어부 그레고리오의 이야기를 듣고 [노인과 바다]를 써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만약에 누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쓴다면 어떤 글이 나올까?

비록 일상에서 배운 경험과 지식일지라도 그 누군가에게는 작품이 될 수 있다.

어른이 해야 하는 것은 잔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이다.

어른의 바다는 어떤 바다일까? 내가 경험하고 알게 된 것을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어떤 바다가 되어야 할까?

노인의 바다는 죽음이라면 어른의 바다는 새로운 세상을 찾는 모험이 되어야 한다.

헤밍웨이에게 그레고리오의 바다는 헤밍웨이를 다른 세계로 가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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